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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뵈르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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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프랑스 파리에 가봤다면 도시 곳곳에서 약간 검은 피부색을 가졌지만 생김새는 백인과 흡사한 북아프리카 사람들을 접했을 것이다. '마그레브' 출신 이민자들이다. 마그레브는 '땅의 끝'이란 뜻의 아랍어로 알제리 .모로코.튀니지 등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을 일컫는다. 세 나라는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경험했고,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베르베르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마그레브인은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1950~60년대 프랑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경제 재건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을 대거 불러들여 광산.건설.공장 등 3D 업종에 투입했다. 당시 프랑스는 마그레브 국가를 찾아 트럭을 대기시켜 놓고 "프랑스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올라타라"고 했을 정도로 외국인 이민에 적극적이었다.

70년대 초 마그레브인의 비참하고 고독한 이민생활 실상이 사회문제로 부각했다. 프랑스는 이들의 부인과 자녀가 합류할 수 있도록 허용, 마그레브 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74년 1차 오일쇼크가 터지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많은 마그레브인은 일거리를 잃고 대도시 근교의 빈민 아파트촌으로 밀려났다.

그 사이 프랑스에서 태어나 속지주의에 따라 프랑스인이 된 마그레브인 2세, 이른바 '뵈르(Beur)'가 성장했다. 뵈르는 집에서는 이슬람 문화를, 학교에서는 프랑스 문화를 접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하층민에 속한 뵈르는 프랑스 사회의 보이지 않는 차별을 체감하면서 증오와 반감을 키웠다. 일부 분야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주류 사회에 진입한 '뵈르주아지(Beurgeoisie)'라는 엘리트도 있다. 하지만 알제리계 뵈르인 축구스타 지네딘 지단은 극히 드문 예일 뿐이다.

95년 제작된 프랑스 영화 '증오(La Haine)'는 뵈르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파리 외곽의 이민자 거주지인 빈민촌을 방황하는 유대계.아랍계.흑인 등 젊은이 세 명을 등장시켜 실업.인종차별.슬럼화.범죄.빈부격차 등 이민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그려냈다.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진 무슬림들의 폭동은 이 영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뵈르의 반란'이다. 국내에도 이주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훗날 그들이 우리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들의 2세가 우리의 배타주의에 절망할 때 한국판 뵈르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