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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부부들 “집 고치는 재미,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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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경기도 용인시 한 아파트 단지 14층에 위치한 59.74㎡(18평) 신혼집은 출입문부터 남달랐다. 철제 출입문 안쪽은 진한 남색 페인트가 입혀져 있었다. 카펫이 깔린 거실에 들어서자 타조 알 크기의 LED 전구 4개가 달린 천장 조명이 보였다. 박현우(34)·이주희(33)씨 부부는 “주로 카페에서 쓰는 전등인데 을지로에서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사왔다”고 했다. 신혼집 곳곳엔 부부의 손길이 배어 있다. 전등 스위치부터 욕실장까지 부부가 재료를 사다 집안 곳곳을 직접 꾸몄다. 인터넷에는 박씨 부부와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셀프 인테리어족(族)’이란 용어가 확산되고 있다. 박씨 부부를 통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셀프 인테리어의 세계를 살펴봤다.

 지난해 10월 결혼한 이들 부부가 셀프 인테리어를 시작한 건 신혼집 계약을 마친 지난해 8월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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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릉역이 직장인데 근처 괜찮은 집들은 가격을 맞추기가 힘들더라고요. 마침 용인에 적당한 집이 나왔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다가 그날 바로 계약을 했어요. 가격도 적당했고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요(웃음). 결혼식까지 2개월 정도가 남았더라고요. 전에 살던 사람도 애 하나를 둔 신혼부부였는데 살림이 빠져나가고 보니 전에 봤던 그 집이 아니더군요.”(박현우)

 화장실 욕조 사이엔 곰팡이가 심했고 거실 벽지 곳곳엔 얼룩이 배어 있었다. 인테리어 업체에 문의하니 도배 비용만 150만원을 불렀다.

 “남편이 귀찮은 것 딱 싫어하는 성격인데 거실하고 방 정도만 페인트칠을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시간 여유도 있었고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하다 보니 싱크대도 손을 대고 욕실장까지 이어지더라고요.”(이주희)

 벽지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흰색 페인트를 입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똑같은 흰색이라도 명도와 채도가 다른 페인트 종류만 수십 가지였다.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다. 이씨의 설명이다.

 “클래식한 느낌을 원하는지 아니면 모던한 것을 좋아하는지 콘셉트를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더라고요. 어떤 방향으로 집을 꾸밀 것인지 전체적인 방향이 결정돼야 마음에 맞는 색도 정하고 조명도 정할 수가 있어요. 그게 가장 먼저였는데 저희는 좀 돌아갔어요.”

 오래된 집안 분위기에 맞춘 노란색이 조금 첨가된 흰색 페인트를 골랐다. 주중엔 직장으로 주말엔 신혼집으로 출근했다. 처제부터 친구들까지 불러다 함께 음식을 시켜 먹고 일했다. 하지만 천장은 엄두가 나지 않아 페인트를 칠하지 않고 그대로 뒀다. 다음으로 세월의 흔적을 누렇게 입고 있는 전기 콘센트와 스위치를 교체했다. 방문 문고리도 인터넷을 통해 구입해 바꿔 달았다.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컸던 게 문고리하고 전기 콘센트였어요. 인터넷을 찾아보면 어떻게 교체하는지 사진과 함께 자세히 나와 있어요. 문고리도 다른 블로그 보면서 따라 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더라고요.”(박현우)

 오래된 싱크대 페인트칠은 거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싱크대 손잡이도 문고리와 마찬가지로 새로 사서 교체했다. 이씨는 “매일 손으로 만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쳐다보게 되는 걸 먼저 바꾸는 게 효과가 크더라고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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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자를 아끼지 않은 건 화장실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체형 세면대 사이사이엔 곰팡이가 가득했다. 세면대를 뜯어내자 뚜껑이 없는 변기만 덩그러니 남았다. 인터넷 목공업체에서 변기 뚜껑 사이즈에 맞춰 나무를 재단해 배송받았다. 나무에 색깔을 입혀주는 스테인을 칠하고 나서 방수를 위해 바니시(코팅제)를 덧발랐다. 나무 변기 뚜껑 하나로 화장실 분위기가 화사하게 살아났다.

욕실장은 조립이 가능한 나무 제품을 구입해 달았다. 욕실 거울엔 각목 네 개를 이어 붙여 분위기를 바꿨다. 5개월 동안 각종 재료비로 160만원 정도를 지출했다. 벽지를 새로 바르는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박씨는 “비용을 절약한 것도 컸지만 내 마음대로 골라 꾸밀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을지로·동대문시장은 셀프족들로 붐벼=셀프 인테리어족의 등장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다. 휴대전화 보급과 함께 셀카족이 등장한 것과 비슷하다. 과거 인테리어 업계에서만 유통되던 다양한 시공 방법이 블로그를 통해 사진과 함께 공유되면서 일반인들도 인테리어에 접근하기 손쉬워졌다. 셀프 인테리어족들을 위한 산업도 뜨고 있다. 지난 14일 들른 서울 을지로 조명골목(을지로3가~4가 사이)에선 손을 맞잡은 신혼부부들을 찾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대광조명 김성복 부장은 “토요일 등 주말에 가게에 들르는 20~30대 신혼부부들이 최근 2~3년 사이에 부쩍 늘었다”며 “인터넷을 통해 가격을 확인한 다음 매장에 오기 때문에 원하는 상품이 명확하다”고 말했다. 매장 한쪽엔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클래식한 느낌의 조명이 전시돼 있었다.

 판매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커튼 가게가 밀집한 동대문시장에선 매장에서 주문을 하면 직접 설치할 수 있는 부품과 함께 택배로 배송해준다. 최근 전셋값 상승도 셀프 인테리어족이 늘어나는 배경 중 하나다.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20~30년 이상 된 오래된 아파트는 박씨 부부 같은 신혼부부들의 몫이 됐다. “예산은 한정돼 있는데 조금 더 깔끔한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에서 셀프족이 됐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손대지 않고 그대로 살다 그대로 두고 나간다’는 전셋집 공식도 깨지고 있다. 서울 양천구에서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영수(54)씨는 “신혼부부들 중 열에 여섯은 집을 고쳐도 되는지 먼저 물어보고 집을 구한다”고 말했다.

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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