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요즘 영화 음악 동네는 실력파 음악인들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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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팝 삽입곡을 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신 대중음악계의 여러 뮤지션이 뛰어들어 영화 음악 판에 새 피를 수혈하고 있다.

최근 개봉작만 봐도 조동익(새드무비).나원주(야수와 미녀).푸딩 김정범(러브토크).달파란과 장영규(소년, 천국에 가다).3호선 버터플라이 성기완(미스터 소크라테스).

베이시스 정재형(오로라 공주.사진(左)).이병우(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右)) 등 쟁쟁한 대중음악가가 기량을 뽐내고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는 "선곡 위주 영화 음악에서 모든 장면에 맞게 작.편곡하는 OST쪽으로 옮겨오는 등 한국 영화 음악의 전반적인 예술적.질적 수준이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음반산업의 불황 때문에 뮤지션들이 영화나 드라마 음악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뿐일까. '마리 이야기' '스캔들' '장화, 홍련' '연애의 목적' 등으로 영화 음악의 거장이라 인정받는 기타리스트 이병우(40)와 파리에서 2년간 영화 음악을 전공하고 돌아온 '베이시스'의 리더 정재형(33). 이 두 음악 감독은 영화 음악에는 '어떤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이병우 감독은 "누가 영화 음악을 해보라고 권하는 통에 부업 삼아 영화 음악에 발을 들였다"고 했다. 기타가 좋아 친 것뿐인데 누군가가 앨범을 내보라고 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기대보다 적성에 잘 맞았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스캔들'로 2004년 상하이 국제영화제 음악상을 수상하고, '장화, 홍련' OST는 일본서도 발매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내가 날 버린 이유'로 인기를 얻고 있던 베이시스 시절, 정재형 감독은 기획사에서 따온 일감('마리아와 여인숙' OST 작업)으로 영화 음악을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일주일 만에 후다닥 해치웠다. 그러나 그 일은 악몽이었다. "막상 시사회를 보고 나니 (음악이) 너무 부끄러워 죽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 길로 파리로 날아가 2년간 영화 음악 공부에 몰두했다. 유학 중 '중독'의 음악을 맡으면서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

사실 영화 음악을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촉박한 마감 시간이 제일 힘들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음악을 구상하긴 하지만 최종 편집물이 나와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음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은 마지막까지 편집에 매달린다. 그러나 개봉일은 정해져 있다.

"오케스트라 작업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최종 편집 뒤 한 달은 달라고 엄포를 놓죠. 그런데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정)

"영화 편집도, 음악도 항상 마지막까지 바뀌죠. 결혼 여부도 식장에 들어가 봐야 아는 것처럼 어떤 음악이 나갈지도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알아요.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지 않나요?"(이)

이 감독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음악을 만들던 시기가 "내 생애 가장 힘든 일주일이었다"고 말한다. 민규동 감독이 최종 편집을 다 끝내고 개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 작업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감독.제작사.투자사 등의 요구와 취향이 달라 음악이 계속 흔들리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 생애…'의 경우 한 장면의 음악을 두고 의견이 끝까지 엇갈렸다. 결국 음악을 수정하기 전.후 두 가지 버전이 상영되고 있다. 필름 프린트를 뜰 시간도 모자라 일부 필름은 미리 복사를 해 둔 탓이다. 간혹 시스템이 받쳐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감독이 '장화, 홍련'의 음악을 만들 때만 해도 영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장비가 충분치 않았단다.

"손바닥 반만한 작은 화면을 띄워 놓고 작업했어요. 게다가 대사는 들리지 않고 영상만 나왔죠."

그래서 김지운 감독이 옆에서 대사를 일일이 불러줬다. "김 감독이 결국 목이 쉬어 버리더군요. 그땐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네요."

기껏 만든 음악이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질 때도 곤혹스럽다. 정 감독이 '중독' OST를 만들 때였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쓰일 음악을 만들었는데 옆에서 듣던 동료는 (스릴러 영화인 줄 알고) "그러니까 A가 나중에 B를 죽이는 거지?"라고 물었다. 만든 음악을 싹 지워 버렸다.

정 감독은 "동요를 만드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오로라 공주'에서 순정(엄정화)의 딸이 부르는 동요는 감독에게 세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이 감독도 '연애의 목적'에서 두 주인공의 풋풋한 사랑 장면에 어울릴 곡을 만들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음악을 들은 한재림 감독은 "40대의 불륜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의견 차이 때문에 영화에는 삽입되지 못한 곡이 OST 앨범에는 실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며 이들이 영화 음악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제 음악을 할 땐 제가 시나리오를 쓰지만, 영화 음악은 남이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와 취향에 맞춰야 하잖아요. 남이 만든 상황 안에 들어가는 게 재미있어요."(정)

"콘서트 때 '스캔들' OST를 연주하니 관객들이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만약 제 앨범에 넣을 생각이었다면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없었을 거예요. 힘들지만 재미있죠."(이)

글=이경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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