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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와 타협않는 강인한 자존론자|어려운 결단내린 버마1인자 「네·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버마 독립 35년과 「네·원」장군의 실권강악 25년을 비교하면 그의 버마내 위치는 쉽게 짐작된다. 버마독립운동에서 시작된 「네·원」의 국가에대한 봉사는 버마의영웅 「아웅 산」장군의 오른팔로, 초대수상 「우·누」내각의 국방상시절등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 버마에서 「네·원」의 이름이 신화적인 이유가 납득이간다 「아웅·산」이 죽은 신화적 존재라면 「네·원」은 살아있는 신비의 인물이요, 국부다.
「네·원」은 버마가 영국식민지로 있던 1911년 버마의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가 중도 대학을 포기하고 우체국 하급관리가 되기도 했었다.
당시 식민지 버마의 비극을 통감한 「네·원」은 뚯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중국의 해남도로 밀항, 거기서 일본군의 맹렬한 군사훈련을 받고 군인으로의 인생을 시작했다.
평소 강직하고 추진력이 뛰어난 그의 임무수행 능력이 돋보여 버마 독립의 아버지「아웅 산」과 가까와지고, 그이후 줄곧 「아웅 산」과 함께 미얀마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네·원」의 버마에 대한 공헌은 독립과 더불어 시작된 국가분열위기의 국난을 구한데서 더욱 돋보인다.
일본의 버마침공과 항일투쟁, 항영투쟁끝에 독립이 가까와졌던 1946년과 47년국내소수민족의 소요를 진압하고 「우·누」내각이 1958년 다시 소수민족소요로 휘청거리자 육군참모총장으로 쿠데타에 성공, 이를진압했다.
그는 1960년 군사통치종식과 총선실시로 「우·누」에게 권력을 다시 이양했다. 「네·원」은 1962년 버마통치의 고질인 소수민족의 저항을 막아내지못한 「우·누」를 또다시 축출하고 군사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네·원」은 1963년 전외국자본및 개인기업의 국유화로 이른바 「버마식 사회주의」를 실시하고 소수민족 저항과 관련, 언제 친공해올지 모르는 중공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 외교적 중립노선을 추구했다.
「네·원」은 절대로 외세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 정평이다. 이 평판이 그를 버마의 제2의 신화적 인물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네·원」은 1949년 중공 연안에서 중국국민당이 모택동군에 대패, 이들패잔병이 버마영내로 넘어와 반공저항운동을 계속했을때나 60년대와 70년대말 버마내 친중공게릴라의 줄기찬 반정부도전에도 불구하고 중공에만은 항상 고개를 숙인 것이 이색적이다.
이는 버마의 국방은 중공을 자극하지 않는데 있다는 버마의 역사적이고 숙명적인입장을 거꾸로 이용한것이라하겠다.
「네·원」이 아웅산묘소사건과 관련, 북괴에 외교적 응징을 가한 것은 버마의 외교적 중립과 국가 자존심훼손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버마의 존엄성과 존위를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신조라면 이번 대북괴응징조치는 아웅산묘소 사건을 새로운 외세의 침공이라는 국난의 차원에서 처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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