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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6)제80화 한일회담(5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일본은 회담 벽두부터 실질적 문제를 토의하자는 우리측 제의에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회담의 전진에 제동을 걸었다. 미국측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 마지못해 회담에 응했던 일본이니 회담도중 평화선선포라는 직격탄을 맞고서야 회담을 더이상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도어느면에서 당연할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측이 먼저 회담을 결렬시키도록 유인하는 계책을 교묘하게 꾸몄다. 그것이 일본의 대한재산청구권주장이라는 것은 유진오박사가 이미 자세하게 설명한대로다.
제1차회담이 걸렬된후 「마쓰모또」(송본준일)일본측 수석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이 회담은 10년이 걸릴것』이라고 말한것을 들었다. 물론 「마쓰모또가 노련한 외교감각으로 회담전망을 한것일지 모르지만 이말은 이 회담에 임하는 일본측의 속셈을 은연중에 비친것으로 나는 느꼈다.
일본으로서는 비록 대한재산청구권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우선 억지라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한 일본대표의 후일 회고처럼 그야말로 생떼에 지나지 않고 회담을 빨리 매듭지으면 지을수록 일본으로서는 불리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제 막 한국전의 특수경기로 경제부흥길에 들어섰다. 그런 처지에 회담을 조기에 타결해 막대한 청구권자금을 한국에 물어야할 하등의 필요성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자국경제부흥에 마이너스요인이 된다. 그러니 될수록 시일을 끌어 일본경제가 반석의 경지에 설 때 한국과 훙정하는것이 일본국익을 의해서 유리하다는 것이 일본측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노련한 외교감각을 지녔던 이대통령은 일본의 이같은 계산을 파악,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일본측의 간교한 침략을 부술 우리측의 실력행사는 일본어선의 나포, 즉 인질외교를 전개하는 수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 평화선선포에 반대했던 이대통령은 역설적으로 이를 효과적인 무기로 사용하는데 강경한 입강을 취해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시를 받아야했던 해군수뇌부를 오히려 당황하게할 지경이었다.
이에따라 평화선이 선포된지 9개월째 되던 52년10월에는 1천여명의 체포된 일본어부가 체형을언도받았다. 사실 이때는 이들을 처벌할 법률도 엾었다. 그래서 정부는10월12일 평화선수비대를 결성하고 10월4일에는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공포하고 금산에 포획심판소를 설치했다. 물론 포획심판령은 임시변통이었고 53년말에 어업자원보호법의 제정을 통해 흡수됐다.
일본정부도 우리측의 일본어선나포에 맞서 한국해역주변에 해상보안경의 순시선을 출동시켜 자국어선의 조업을 보호하겠다는 강경자세를 표명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현해탄의 파고가 높아지자 미국은 한일간의 마찰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클라크」연합군사령관은 우선 평화선을 둘러싼 한일간의 마찰을 극소화하려는 의도의 일환으로 한국해역에 방위선 (일명 「클라크· 라인」) 을 설정해 일본어선의 조업을 사실상 제한했다.
그는 또 이대통령을 53년초 일본에 초청, 「요시다」(길전무) 일본수상과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 양자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일본도 한국수역에 출어해 생계를 잇던 서부일본어민들의 실정을 고려치 않을수 없었다. 미국의 개입때문에 힘으로 맞서려던 당초의 계획도 좌절되고 보니 미우나 고우나 한국측과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정부는 53년1월27일 정식으로 한일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본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교섭을 갖자는 제의를 했다.
일본은 이와함께 서울에 주한일본대표부의 설치를 요청했다. 일본은 점령국최고사렁부(SCAP)에 대한 외교사절로 동경에 설치했던 주일대표부를 대일강화조약 발효이후에도 그대로 두도록 승인했던 조치에 대한상호주의원칙에 따라 주한대표부의 설치를 제의했지만 완강한 반일주의자였던 이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턱이 없었다.
이대통령은 제2차회담의 재개만은 승낙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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