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경쟁력이다] '동양의 나폴리' 통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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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열린 지난달 31일 통영시민회관 입구에서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달 31일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항의 아름다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남망산 공원 내 통영시민문화회관. 세계 최정상급인 독일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려는 관객들의 줄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지난달 28일부터 6일까지 열린 통영국제음악제(TIMF) 가을 시즌 행사의 하나인 이날 공연은 800여 개의 객석을 가득 채운 관중이 앙코르를 연발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고향이라는 이미지를 살린 국제 음악회를 4년째 열면서 전 세계 음악인들이 통영으로 몰려오고 있다. 서울에서도 하기 힘든 봄.여름.가을 시즌 등 연중행사로 음악회를 열면서 쇠퇴한 지역 경제도 살아나고 있다. 한려수도의 항구도시 통영이 음악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 연중 열리는 음악제=통영 국제음악제는 봄(3, 4월), 여름(6, 7월), 가을(10, 11월) 등 겨울철만 빼고 열리고 있다. 봄 시즌에는 초연 현대음악, 여름엔 윤이상 음악 아카데미, 가을엔 국제콩쿠르 등으로 구분돼 있다. 이러한 차별화 전략에 따라 청중도 봄에는 매니어, 여름엔 전공 교수들과 학생, 가을엔 일반시민 등이 주로 찾는다. 2000~2003년까지는 2, 3월에 1주일 전후로 열렸으나 지난해부터 시즌 행사로 확대했다.

해외에서도 연중 음악제는 '스위스 쿠체른 축제' 등이 꼽힐 정도다. 이 음악제도 봄(부활축제), 여름(피아노), 가을(오케스트라) 등으로 구분돼 열린다.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프린지 공연도 2002년 국내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공연은 발표 무대를 갖기 어려운 아마추어 음악인들에게 인기를 끌어 해마다 100여 회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 이용민(41) 사무국장은 "반짝 음악제가 아니라 1년 내내 행사를 끌어감으로써 다양한 음악팬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윤이상의 명성을 이용=통영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95)을 낳은 곳이지만 한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그의 사상을 문제 삼는 시각이 있는 한 그를 기리는 음악제를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의 우려 속에 99년 5월 처음으로 '윤이상 가곡의 밤'이 열렸다. 독일 유학 중 윤이상을 만난 뒤 귀국한 김승근(38.서울대 국악과) 교수 등이 통영지역 음악인들과 함께 열어 호응을 받았다. 이 추모 음악제는 2000, 2001년 '통영 현대음악제'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2년 재단(이사장 이홍구 전 총리)이 설립되면서 본궤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윤이상의 브랜드 파워는 놀라웠다. 윤이상의 고향에서 열리는 음악회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명 음악가들이 몰려왔다. 6월에 열린 봄 시즌에는 미국의 저명 작곡가인 스티브 라이히가 참가하는 등 지금까지 정명훈.하인츠 홀리거.주빈메타.발레리 폴리안스키 등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통영을 찾았다.

가을 시즌의 하나로 4일 통영서 열린 2005 경남국제음악콩쿠르 1등은 이탈리아 코모피아노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빅토리아 코르친스카야(27.여.캐나다)로 본선 진출자 5명 중 4명이 모두 해외 유명 음대 출신들이었다. 7월 열린 여름 시즌 윤이상 음악 아카데미 행사에도 독일 21명, 일본 2명 등 해외에서 23명이 참가, 전체 참가자 250명의 약 9%를 차지할 정도였다.

◆ 민.관.기업의 지원=통영국제음악제는 문화관광부 평가에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A+를 받았다. 이런 배경에는 자치단체.기업체의 적극적인 지원과 시민들의 참여가 뒷받침됐다.

통영시는 제도적 지원을 위해 2002년 조례를 만들어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예산 15억여원 중 통영시 11억원, 경남도 1억원 등 자치단체가 12억원을 부담했다. 나머지는 입장료 수입과 기념품 판매 등으로 충당한다. 통영과 서울의 재단사무국 전체 인원 10명 중 4명이 공무원일 정도로 인력도 적극적이다. 금호그룹도 해외 참석자들의 항공료와 숙박비 등으로 연간 1억여원씩 부담하고 있다.

통영시는 2001년 도천동 해방교~해저터널(790m) 간을 '윤이상 거리'로 지정한 데 이어 80억원을 들여 도천동 1635평에 '윤이상 공원'을 조성 중이다. 재단사무국은 올해 일반 공연 관중 1만5000여 명, 프린지 공연 4만2000여 명 등 5만7000여 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통영시 인구 13만여 명의 절반 정도가 음악회를 관람한 것이다.

음악회가 초기에 자리 잡는 데 시민 후원 조직인 '황금파도'(회장 이민기.49.치과 원장)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시민 3000여 명으로 구성된 황금파도는 표를 구입해 주변에 나눠주는 '표 나눔 운동'을 펴 관중 동원에 크게 기여해 왔다. 음악회 시즌 중에는 멸치 매출이 느는 등 지역 경제도 활기를 띠고 있다.

통영=김상진 기자 <daeda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홍보 게릴라 'TIMF 앙상블의 힘'
20명으로 구성 국내외 돌며 연주

통영국제음악제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TIMF 앙상블'은 국.내외를 도는 '홍보 게릴라'다. 앙상블은 바이올린.플루트.오보에.제르베즈.클라리넷.비올라.하프.피아노 등 20여 명의 연주자로 구성된 소규모 합주단을 말한다. 70여 명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을 운영하려면 예산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앙상블을 구성한 것이다.

2001년 창단한 TIMF 앙상블은 2003년부터 해외로 무대를 넓히고 있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 최우정 교수(37)가 예술감독을 맡는 등 주로 30~40대의 젊은 연주자로 구성돼 현대 음악만을 전문으로 연주한다. 해마다 국내 연주 10여 차례에다 해외 연주도 한두 차례 참가하며 통영국제음악제를 알리고 있다.

2003년 루마니아 바커우 현대음악제 개막연주단체로 초청돼 좋은 연주를 보여주자 해외 초청이 잇따르고 있다. 해외 연주 첫해만 경비를 자체 부담했을 뿐 지난해부터 초청 측이 경비를 부담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8월 아시아작곡가연맹이 태국에서 주최한 25회 국제현대음악제에 참석했다. 2005 바르샤바 가을축제에도 초청을 받았다. TIMF 앙상블은 주로 국내 작곡가들의 초연작을 연주해 한국음악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지난해 6월 독일 공연에서는 현지 신문들로부터 "아시아에서 온 우수한 곡을 유럽에 소개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지난해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올해의 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관객들의 사랑방 구실 할 것"
'TIMF 카페' 자원봉사자 정방인씨

통영 국제음악제가 열린 지난달 28일부터 6일까지 통영문화예술회관 로비 한쪽에 'TIMF 카페'라는 네온등이 반짝였다. 작은 테이블을 놓고 커피.빵.과자 등을 관객들에게 파는 곳이다. 이 카페의 운영 책임자는 정방인(23.여.서울시립대 대학원생.사진)씨. 통영국제음악제 홈페이지에서 자원봉사자 모집 안내를 보고 자원한 그는 10월 초부터 서울 사무국에서 근무하다 가을 시즌이 시작되면서 통영으로 갔다.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사무국에서 마련한 숙소에 머물면서 사무국에서 내준 티켓으로 식사를 해결하며 온갖 궂은 일을 해내고 있다. 카페 운영, 기념품 판매, 안내 등이 주요 임무다. 정씨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카페지만 관객들이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음악회를 친근하게 여기는 데 기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공연기획을 전공하고 있는 그는 "국제 음악제의 기획과정과 흐름을 파악하면서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게 보람"이라고 했다.

서울 사무국에서는 관객들에게 판매할 출연자들의 CD.기념품 등을 해외에서 구입하는 일과 홈페이지 관리 등을 도맡느라 밤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앨범을 판매할 때는 보람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통영 국제음악제에 참가하는 해외 거장들의 앨범은 흔하지만 윤이상 앨범을 구하기가 어려워 금방 동이 나기 때문이다.

정씨는 "관객들이 '이렇게 귀한 앨범이 여기 있구나'라며 기쁘게 사가면 앨범을 구입하느라 고생한 기억이 눈 녹듯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공연기획가를 꿈꾸는 정씨는 "윤이상 같은 음악가를 찾아내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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