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저유가의 달콤함에 탐닉할 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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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

수년 전에도 유가는 급락한 적이 있었다. 2008년의 리먼 사태 이후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왔다. 그해 7월에 유가는 배럴당 147달러였지만 연말에는 40달러까지 내려왔다. 유례없는 속도의 대폭락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노력과 함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두 차례에 걸친 감산을 단행함으로써 유가는 1년여 만에 다시 회복됐다. 석유 가격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제 석유시장을 지배하는 이른바 OPEC의 시장 조정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주도하는 OPEC과 석유 메이저들의 시대는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의 석유시장은 그 사정이 확연히 달라져 버렸다. 급락하는 속도는 비슷한데 OPEC은 감산을 포기했다. 오히려 유가 하락을 부채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음모론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사우디가 연합해 산유국인 이란과 러시아를 압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사우디가 미국의 셰일가스를 혼내주기 위해 일부러 방관하고 있다고 풀어내기도 한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저간의 사정이나 속마음은 확인할 길이 없다.

 한 가지는 명확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들이 처한 시장 환경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석유를 감산해 봐야 남 좋은 일이 되고 시장 지배력만 상실하게 됐다.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나만 손해 볼 수는 없다는 각자도생의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셰일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질서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OPEC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매우 어렵다. 석유 수요는 고만고만한데 공급이 자꾸 늘어나면 유가가 다시 반등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상당한 기간 그렇게 갈지도 모른다. 누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의 질서가 변했다. 그러나 셰일혁명의 효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정도가 아니라는 얘기다.

 저유가 쇼크는 시장의 반응을 불러오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급을 위한 투자는 지연되거나 취소될 것이고, 가격이 낮으니까 수요는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유가는 언젠가 다시 반등할 것이다. 이 또한 시장의 법칙이다. 하지만 유가가 반등하는 과정에서도 강력한 견제를 받게 돼 있다. 셰일가스의 개발은 일시적으로 주춤하겠지만 가격이 오르면 즉각 생산을 재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셰일가스는 미지의 땅을 개발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개발된 땅에서 나온다. 증명된 공급원이다. 더구나 생산 원가를 낮추려는 노력 속에 기술이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오랜 시간 석유시장을 지배해 온 OPEC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기술 진보가 빠른 경쟁자를 갖게 된 것이다. 자원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오랜 기간 석유시장을 지배해 온 메커니즘이 무너지고 있다. 바로 기술 진보의 역동성이고, 시장의 힘이다.

 적극적인 조정자가 사라진 석유시장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 될까.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다. 아직은 시간이 더 지나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적 기관들의 예측이 서로 엇갈리고 있음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앞으로는 산유국들이 똘똘 뭉쳐 고유가로 몰고 가는 일은 과거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석유시장의 변동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석유시장은 공급과 수요가 모두 가격에 대해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공급이 좀 늘어나면 급락하고, 수요가 조금만 늘어나도 급등하는 현상이 반복될 것으로 전망한다.

 다량의 에너지를 수입하는 산업국가로서는 가격 수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유가의 급등락이다. 적극적인 조정자가 없어진 시장의 오버스윙은 어느 방향이든 우리 경제를 멍들게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가를 위협할 수 있는 국제 정치적인 여건이나 금융시장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이내믹스를 보이고 있다.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을 때까지 많은 곡절과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에너지 가격이 내려가는 것은 우리로서는 가뭄에 단비 같은 일이다. 작금의 어려운 경제 여건을 풀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좀 더 시야를 길게 보면 저유가의 달콤함에 탐닉할 때가 아니다. 전 세계의 에너지시장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평가하고 있으며 활발한 인수합병(M&A)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래의 계획을 수정하고 에너지 안보를 위한 생존 전략을 리뷰하고 있다. 에너지에 투자하고, 생산하며, 거래하고, 소비하는 전 과정에서 활발한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잘못된 투자는 거둬들이고, 거품이 낀 부분은 걷어낼 것이다. 제도를 혁신하고 경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국내 에너지 산업의 대변혁이 필요하다. 경제 개발 단계에 만들어진 국가 주도의 경직적 시스템으로는 미래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 수입 에너지 가격이 낮고, 전력 수급에도 여력이 생긴 지금이 변화를 모색하는 적기이다. 에너지를 전적으로 수입하는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는 늘 우리의 몫으로 남게 마련이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