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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복지’를 ‘재정복지’로 바꿔 불러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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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현승
서강대 경영학과 초빙교수
『늙어가는 대한민국』 저자

최근 정치권에 ‘증세 없는 복지’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세금을 더 내지 않고도 더 많은 복지를 향유할 수 있다면 국민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문제는 ‘증세 없는 복지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증세 없는 복지는 눈속임에 불과하다며 증세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의 조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복지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주장 모두 일리는 있다. 하지만 모두 아쉽게도 투입과 산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흔히 대부분의 일은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투입, 투입의 실행 또는 전달, 그리고 산출이다. 하지만 최근의 증세 복지 논쟁은 투입의 실행과 전달 체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담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경우 어떻게 실행하고 전달하느냐에 따라 비슷한 투입으로 매우 다른 산출물을 가져올 수 있는데도 말이다.

 회사의 준공식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첫 번째 사례: 많은 축하 화환이 전달되고 관계자들이 모여 축사와 테이프 커팅을 한다. 준공식이 끝난 후 그 많은 축하 화환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다.

 #두 번째 사례: 축하 화환 대신 쌀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물론 식장에는 보낸 사람의 리본이 붙어 있다. 쌀을 보낼 때 가급적이면 회사가 속해 있는 지역의 농협을 이용해달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이를 통해 지역 농협과 돈독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받은 쌀을 도움이 필요한 지역의 기관에 기부한다. 기부받는 기관에 계신 분들을 준공식에 초청하면 지역사회 주민과 함께하는 회사가 될 것이다. 회사 사람들과 유명 인사들로만 준공식을 하는 것보다 느낌도 다를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의 기부 활동을 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회사의 준공식도 홍보될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첫 번째 사례에 비해 유사한 비용을 들이면서 실행과 전달 체계를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많은 효과를 거뒀다. 만약 전달 체계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하게 투입과 결과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과거와 똑같은 관행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적 전달 체계를 위한 기본은 무엇일까.

 첫째, 물품·서비스 등을 기존 방식대로 공급하기보다 수요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이에 대한 고민은 투입 단계부터 시작돼야 한다. 어떤 투입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전달 체계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준공식 사례도 처음부터 투입을 축하 화환으로 한 경우는 전달 체계의 개선이 쉽지 않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노인들이 노인들을 돌봄으로써 단순한 금전 지원을 넘어 일자리와 보람을 제공하는 ‘노노케어’는 좋은 사례다.

 둘째, 기대배반죄를 막아야 한다. 국가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신뢰다. 신뢰는 계약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신뢰를 유지하고 계약을 지킬 수 있기 위해서는 기대 관리가 필요하다. 일단 과도한 기대가 형성되면 높은 수준의 혜택을 줘도 불만과 불만족이 확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무상급식, 무상보육은 이름부터 잘못 지어졌다. 실질적으로 무상이 아니라, 국가 재정이 부담하고 있음에도 무상이란 명칭 때문에 마치 공짜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따라서 이는 ‘재정급식’ 또는 ‘재정보육’으로 불려야 한다. 정확한 개념과 이름 아래 복지의 우선순위가 정해져야 전달 체계의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속도로 저출산·고령화 국가가 돼 가고 있다. 그에 반해 길어진 노년에 대한 대책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 국가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방송국에서 100세를 맞이한 할머니를 초대해 방송 출연료를 갖고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어보니 불안한 미래를 위해 저축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고령화 국가에서 소비가 늘지 않는 이유다. 노년의 대책이 부족한 상태에서 향후 한국은 원하든 원치 않든 복지국가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미 복지국가를 향한 시동은 켜져 있다. 재정은 부족한데, 국민들의 기대 수준은 높아만 간다. 저출산·고령화로 물구나무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물구나무서기를 한 상태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과 저성장 시대 진입으로 인해 문제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경제가 성장하는 시기에는 미래의 혜택을 담보로 현재의 희생을 요구하고 수용할 수 있지만, 성장이 침체되면 현재 자신의 이해관계가 최우선시된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투입을 어떻게 실행하고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포스코 정문에 오랫동안 붙어 있는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란 슬로건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제 우리는 유한한 자원을 갖고 무한한 창의로 행복한 복지국가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현승 서강대 경영학과 초빙교수 『늙어가는 대한민국』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