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아시아] 고이즈미 개혁 뒤엔 '경제재정자문회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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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고이즈미 개혁의 출발점은 관료 주도의 정책 결정을 총리 주도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고이즈미는 ‘경제재정 자문회의’를 개혁의 사령탑으로 삼았다.

◆ 관료를 거세하라=해마다 11월이면 재무성은 대목을 맞는다. 12월 국회에서 확정될 다음해 예산안을 짜는 달이기 때문이다. 각 부처 공무원들은 한 푼이라도 더 타내기 위해 관련 자료를 싸들고 재무성 담당자들을 만나기 위해 혈안이 된다.

'관청 중 관청'이라 불리던 옛 대장성(大藏省) 시절부터 이어져 온 재무관료의 권력 기반은 예산 편성권이었다. 경제분야뿐 아니라 돈이 필요한 모든 정책, 심지어 자위대의 인원 조정과 신무기 도입 등 방위정책까지 재무성 관료들은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그런데 재무성의 권력은 고이즈미 집권 이후 크게 약화됐다. 예산 편성의 기본 방침을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 6월께 미리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컨대 "국채 발행을 30조 엔 이하로 억제할 것" "지방 보조금을 2006년까지 4조 엔 삭감할 것" 등 큰 줄기를 잡는다. 재무성은 이 틀 안에서 숫자 맞추기 작업을 해야 한다. 고이즈미는 이런 식으로 재무 관료의 힘을 빼는 데 성공했다.

바뀐 건 예산만이 아니다. 중의원 해산과 총선으로 이어진 우정 민영화 개혁은 물론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중앙.지방정부의 세원.재정 개혁, 공무원 인원 삭감 등 굵직한 개혁과제는 모두 여기서 정해진다.

고이즈미는 자문회의의 결정사항을 반드시 내각에서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힘을 실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자문회의의 결론이 구속력이 없는 참고사항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 "관료의 상식은 세상의 비상식"=경제재정자문회의는 2000년 행정조직 개편과 함께 탄생했다. 미국의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와 국가경제회의(NEC)를 모델로 삼았다. 명칭은 자문회의지만 엄연한 상설기구로 180명의 직원을 거느린다. 구성원은 의장을 맡는 총리와 관방장관.총무상.재무상.경제산업상.경제재정담당상 등 5명의 각료와 일본은행 총재가 당연직으로 포함된다.

특이한 것은 민간인도 4명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자동차 회장과 우시오 지로 경제동우회 대표 간사, 혼마 마사아키 오사카대 교수, 요시카와 히로시 도쿄대 교수가 재계와 학계를 대표해 참여하고 있다. 매년 30여 차례 열리는 회의의 발언록은 100% 공개돼 투명성을 강조한다.

회의록을 살펴보면 민간위원들이 얼마나 큰 발언권을 갖고 각료들을 몰아붙이는지 알 수 있다.

"연금개혁안 마련은 민간이라면 1년이 아니라 두 달이면 끝낼 수 있다." "삭감하기로 했으면 3%, 4%를 운운할 게 아니다. 민간에선 최소한 10%는 돼야 삭감이라고 한다." "가스미가세키(일본의 관청 거리가 있는 지명)의 상식은 바깥에선 비상식이다." 민간위원들의 독설은 고이즈미 총리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하다.

회의 패턴은 대체로 일정하다. 다음번 회의 안건이 정해지면 사회자 역할인 다케나카 헤이조와 4명의 민간위원이 미리 협의한다. 민간위원들은 사전 협의에서 의견을 모아 문서화한 뒤 이를 자문회의에 제출한다. 이어 각 부처 입장을 대변하는 각료들의 반론이 이어지고 회의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결론은 고이즈미 총리가 내리지만 대체로 민간위원들의 손을 들어 준다.

◆ 개혁의 브레인 다케나카=이 모든 과정에서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이즈미 개혁의 중요 과제는 대부분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이오대 교수 출신인 그는 고이즈미 정권 출범과 함께 입각해 줄곧 개혁 브레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는 지난달 개각에서 경제재정담당상에서 총무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이즈미의 신임 덕에 도쿄 정가에서는 "고이즈미의 마음속에 있는 차기 총리감은 다케나카"란 말도 나오고 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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