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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요사태 11일째 "수십년 땀 흘린 이민자에게 준 건 차별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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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프랑스 소요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6일 서남부 툴루즈의 한 빌딩 앞에서 자동차들이 불타고 있다. [툴루즈 AP=연합뉴스]

"파리 교외에 사는 젊은이들은 25년 전부터 그들만의 언어와 세계관을 만들어 그것을 대물림했다."

이번 소요 사태가 발생한 지역에서 20년간 교사로 일한 아마르 앙니는 6일자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주류 사회와 무슬림 이민자들 간의 거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앙니는 "프랑스 북쪽 끝 릴에서 남쪽 끝 마르세유까지 이민자들이 사는 거리에선 이들만의 언어가 통한다"고 말했다.

◆실패한 사회 통합=이번 사태를 계기로 '평등의 나라' 프랑스가 사회 통합에 실패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스페인의 유력지 엘 파이스는 4일자 사설에서 "프랑스는 열렬히 평등의 이상을 부르짖고 있지만, 대도시에서 쫓아낸 사람들을 많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격리된 지역에 가둬놓고 있다"며 보이지 않는 차별을 비난했다. 같은 날 뉴욕 타임스도 "프랑스가 이민자들을 통합하는 데 무능함을 드러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6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무슬림을 포함, 수많은 이민자가 사는 프랑스에서 사회 통합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실업 문제 때문이다.

리베라시옹은 6일자 사설에서 "프랑스는 30년 전부터 끊임없이 시달려 온 대량 실업의 충격 속에서 더 이상 이민자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정통 프랑스인'들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판에 이민자들에게는 취업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선 일자리를 찾아 캐나다.영국.호주 등으로 떠나는 젊은이들의 인력 유출 문제가 주요 사회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이민자의 높은 실업률은 통계로도 잘 나타난다. 정통 프랑스인의 실업률은 9.2%인 반면 외국계 이주민의 실업률은 14%에 이른다. 대학 졸업자의 경우 실업률은 5%에 불과한 데 비해 같은 학력의 북아프리카계 이민자 실업률은 26.5%나 된다.

◆프랑스식 경제시스템의 한계=사회 통합 실패는 프랑스의 사회경제 체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유럽 내 둘째로 많은 인구와 둘째로 높은 출산율을 자랑하는 프랑스가 그 많은 인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성장보다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시스템도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파이를 키우는 것보다 나눠주는 데 역점을 두다 보니 근로 의욕이 저하돼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복지 혜택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식 소수 우대 정책도 프랑스가 도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절대 평등'을 주창하는 프랑스로서는 이 같은 정책이 또 다른 불평등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아지는 자성의 목소리=르몽드는 7일자 사설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1990년 발표한 '사회 통합 연설'을 다시 소개했다. "영혼이 없는 거리에서 태어나, 지저분한 주위 환경에 둘러싸여, 더러운 건물에서, 회색 빛 벽과 풍경을 보고, 회색 빛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평소에는 외면하다가, 화를 내거나 금지시킬 일이 있을 때만 자기를 쳐다보는 주류 사회를 보면서 과연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르몽드가 미테랑 전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한 것은 4일 외국 언론으로부터 "프랑스가 사회 통합에 실패했다"고 지적받은 것을 새겨 듣자는 취지에서다. 외국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르몽드는 "인권의 나라로, 그리고 관대한 사회 모델의 성지로 자처하는 프랑스가 이민자 후손들에게 합당한 삶의 조건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들의 조부모들은 프랑스로 건너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광의 30년' 건설에 기여한 사람이지만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실업과 인종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주즈 베가 기회균등증진 장관은 리베라시옹과의 회견에서 "호전적인 발언들로 가득한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대응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며 "질서를 되찾기 위해서는 단호한 말들이 필요하지만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는 차별을 척결하면서 질서 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인종차별 단체인 'SOS-라시즘'의 도미니크 소포 회장은 "경찰 대응만으로는 안 된다. 교외의 사회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시라크 "폭력 확산하는 사람 반드시 처벌"

차량 700여대 또 방화
한국 취재진도 구타당해

프랑스 빈민가에 사는 무슬림 이민자 청년들의 소요가 계속되는 가운데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사태 발생 11일 만인 6일 특별대책회의를 열고 방화 등 범법행위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방침임을 밝혔다. 그는 회의 후 "폭력과 공포를 확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도 "폭력이 답이 될 수 없다"며 "법 절차를 서둘러 검거된 사람들을 즉시 특별법정에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국에서 치안 조치가 강화될 것"이라고 했으나 이날 저녁에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프랑스 서부의 낭트.오를레앙.렌에서는 차량 방화가 잇따랐고 남부의 툴루즈에선 청년들이 총기로 경찰을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6일 밤과 7일 새벽 사이 프랑스에선 764대의 차량이 불에 탔고, 경찰 10여 명이 총기 공격을 받아 부상했다. 경찰은 폭력 용의자 173명을 체포했다. 이에 앞서 5일 밤과 6일 새벽 사이에는 차량 1300여 대가 불탔다. 경찰은 폭력을 막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무슬림 청년들의 소요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다.

폭력사태가 확산되면서 한국 취재진이 무슬림 청년들에게 구타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6일 오후 파리 외곽 북동쪽의 클리시 수 부아 거리에서 취재 중이던 동아일보 금동근 특파원이 북아프리카계 청년들에게 방화 현장을 묻다가 한 차례 뺨을 맞았다. 금 특파원은 "안경알이 깨졌으나 얼굴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며 "청년들은 카메라 가방까지 빼앗으려 했다"고 말했다.

5일 오후엔 파리 북쪽 외곽의 오베르빌리에에서 KBS 취재진이 청년들의 공격을 받았다. KBS 파리지국 관계자에 따르면 흑인 청년 5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방송용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그들에게 저항하던 취재 보조원 김모(31.여)씨를 구타했다는 것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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