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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논하다] 4. "20년 후면 현재 노동력의 5%만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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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러미 리프킨(오른쪽)을 만난 곳은 9월 9일 세계진보포럼 대회가 열리고 있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호텔이었다. 자신을 미래학자보다는 사회운동가라 불러 달라고 부탁한 그는 한국의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미래를 통찰하는 사회운동가이자 사회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을 만났다. 많은 미래학자가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데 반해 리프킨은 위기의 미래를 경고하는 선지자다. 막연한 비관이나 과민한 경계가 아니다.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노동.환경.에너지.생명공학.정보통신.시민운동 등 다양한 주제별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그에게서 인류를 이끄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다.

가을비치고는 무거운 빗줄기를 맞으며 제러미 리프킨(60)이 묵고 있는 호텔을 찾은 날은 9월 9일이었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 어울리지 않게 이곳에서 세계진보포럼(Global Progressive Forum)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독일 사민당, 이탈리아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등 사회주의 유럽 정당이 참여하는 이 포럼에서 미래학자로만 알고 있던 리프킨이 기조연설을 한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연락을 하니 십여 분 후에 말쑥한 정장 차림의 리프킨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미래학자가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이 21세기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미래전략을 제시하기 위해 왔습니다. 저는 미래의 도전에 대해 이념을 초월해 조언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의 한 대기업의 초청을 받아 미래 에너지 등을 주제로 강연과 컨설팅을 해줬지요."

리프킨은 최근 10년 동안 인류의 미래를 바꿀 5대 현안에 몰입해 왔다고 밝혔다. 노동문제, 생명공학, 새로운 경제 시스템, 수소혁명, 유럽의 미래다. 최근 저작인 '유러피언 드림'을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끝났습니다. 미국의 꿈이 개인주의적 꿈에 기초하고 있다면 유럽의 꿈은 지역사회의 꿈을 바탕으로 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유러피언 드림은 아메리칸 드림의 거울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자동차(automobile)로 상징되는데, 이는 자율(autonomy)과 이동성(mobility)의 합성개념이죠. 미국인은 카우보이 의식구조로 이제껏 발전해 온 셈입니다. 이런 자유의 개념은 개인 발전을 위해서는 희망으로 작용했지만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마이너스였습니다. 미국은 결국 실패 국가가 됐죠. 유럽은 삶의 질을 추구했지만 미국은 개인의 경제적 발전만을 좇았고 그 결과 미국이 부흥한 국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게 된 겁니다."

리프킨은 그 배경으로 사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수치를 들었다. 미국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유럽의 4배다.

미국인은 휴가를 일 년에 평균 10일 정도 가는 데 비해 유럽인은 4~6주의 휴가를 간다. 유럽은 미국보다 의사 수가 훨씬 많고 복지 시스템도 잘 정비되어 있다.

유럽은 미국보다 노동시간은 짧지만 시간당 생산의 효율은 더 높다. 미국 경제가 활성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국민이 신용카드를 더 많이 긁어 빚더미 위에서 소비를 해온 결과다.

미국 정부가 실업률이 7%라고 발표하지만 실제는 9%다. 나머지 2%는 감옥에 있어 계산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20대와 30대 흑인 남성 절반은 감옥에 있거나 현재 수배 중이다. 그는 "사회공동체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주의적 발전만을 지향해온 미국 사회는 유럽에 비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드는 실패한 사회"라고 못박았다. 리프킨의 다음 한마디가 따끔했다. "한국은 (이런) 미국의 발전모델을 따르면 안 된다."

그는 성장만 바라보는 발전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유럽모델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에 닥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의 급속한 해체입니다. 현재 만드는 모든 생산품에 드는 노동력의 5%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상황이 앞으로 20년 안에 옵니다. 컴퓨터와 자동화의 발전 때문이지요. 값싼 노동력을 경쟁력으로 내세웠던 중국도 지난 7년 동안 15%의 노동력을 실업자로 내몰았어요. 이제 인류는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새로운 르네상스'라 불리는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이트 칼라(사무직)의 실업이 급속히 늘어나 결국 중산층의 몰락이라는 새로운 암흑기에 맞닥뜨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미래의 대안은 무엇일까. 리프킨이 주장한 것은 노동조합의 보호도 아니고, 세계화의 경쟁력 강화도 아니다. 그는 노동의 나눔(work-sharing)을 강조한다. 이제 겨우 주 40시간 근무를 이룬 한국으로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주 20시간 근무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랑스는 이미 1999년부터 주 35시간 근무를 달성했다. 문제는 있다. 노동을 나누면 경영주는 더 많은 근로자를 고용해야 하고 이는 비용의 압박이 된다. 해법은 노동의 나눔을 실천하는 기업에 대해 정부가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거둔 세금은 실업수당에 쏟아붓기보다 일자리를 나누고 법인세를 적게 거두는 데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은 사회공동체를 위한 봉사활동을 강화하는 겁니다. 20세기까지 고용은 시장과 정부가 주로 담당해 왔지요. 21세기에는 남는 노동력이 제3의 위치에 있던 시민단체로 이동돼야 합니다. 사회 공동의 문제를 시민단체의 봉사활동을 통해 풀어가는 것만이 노동의 나눔과 함께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시민이 봉사활동을 하면 헌혈증서처럼 봉사증서를 받아두었다가 나이 들어 도움이 필요할 경우 되돌려받을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는 것도 좋겠지요."

두 시간밖에 짬이 없다고 했던 리프킨은 이야기에 흥이 올라 점심을 끝내고 나서도 한참을 더 대화에 열중했다. 한국사회가 풀어야 할 몇 가지 핵심적인 현안에 대해 지적해 주어 꽤 흥미로웠다.

"황우석 교수의 배아복제 줄기세포 연구는 개인적으로 반대합니다. 줄기세포 연구 자체는 적극 지지합니다. 하지만 배아를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절대 반대죠. 이미 지난달에 피부 세포 등을 이용하여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줄기세포를 생성하는 연구를 하기 바랍니다."

그는 에너지 위기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중국이 급속히 경제성장을 하면서 석유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재사용이 가능한 청정 동력인 수소 에너지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고 했다. 수소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면 사회의 재투자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노동의 문제도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했다. 전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모든 사회 인프라가 바뀐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한마디도 재미있었다.

"현재 참여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이 비판받는 측면인 아마추어리즘은 그 어원이 사랑(amor)인 만큼 저는 좋은 쪽으로 해석합니다. 단지 열정을 지닌 사회 변혁가들이 숙제(homework)를 미뤄놓거나 제대로 하지 않아 문제지요."

리프킨은 자신이 미래에 대한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도 아닌 현실주의자라고 규정했다.

정치적으로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고, 기업이나 사회단체 등에 대해서도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컨설팅을 한다고 밝혔다. 자신의 조국인 미국과 부시 행정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일 년의 절반은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후손에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남겨주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열변을 토하는 그의 정열이 인상깊었다.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 등 저서 17권
미래 사회 대안찾기 노력

1995년 '노동의 종말'을 출간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최근 내놓은 '유러피언 드림'으로 다시 화제의 저자가 됐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의 교수지만 주된 활동은 자신이 설립한 경제동향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을 중심으로 한다. 미래학자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사회비평가이고 사회운동가로서 연구와 강연.저술 활동을 벌이며 사회변혁을 꾀한다.

45년 태어나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 스쿨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터프트 대학에서 국제관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인권.환경 등에 관한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30년 동안 17권의 사회 비평서를 출간했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참신한 아이디어로 밝은 미래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도 '노동의 종말' '유러피언 드림'을 비롯해 '바이오테크 시대'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수소혁명' 등의 저서가 번역 출간되었다.

염재호 교수는

고려대 행정학과 소속이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일본의 첨단산업 정책'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딜레마 이론' '일본의 경제 성장과 정부의 역할'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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