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 이제는] 23. 열 달 전 LG카드 채권 산 은행 손들어 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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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국내 은행들의 대출 심사 능력은 외환위기라는 홍역을 겪은 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기업 분석능력이 부족해 자금이 필요한 기업에게 은행 문턱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지난해 12월 LG카드에 대한 추가 출자전환이 진행될 때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국내 은행의 대출 심사 능력에 대해 이런 혹평을 내렸다.

당시 채권은행을 포함한 국내 금융회사들은 LG카드에 대해 서로 손사래를 치기에 바빴다. 삼성카드의 두 배인 연 7.5%의 이자를 준다는데도 아무도 LG카드가 발행한 채권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LG카드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때 LG카드의 미래 가치를 알아보고 거액의 돈을 빌려준 곳은 외국인 투자자였다. 미국계 투자은행 메릴린치는 LG카드가 발행한 4억 달러의 자산담보부증권(ABS)을 전격 인수했다. 이후 LG카드는 연간 1조원이 넘는 이익을 내는 알짜배기 회사로 변신했다.

불과 1년도 안 돼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당시 LG카드를 외면했던 금융회사들이 최근 앞다퉈 LG카드 인수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이처럼 상황이 벌어지고 난 뒤 우루루 몰려다니는 국내 금융회사의 행태를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떼거리 금융 관행"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실제로 국내 금융계에는 다른 금융회사가 대출하면 뒤따라 대출하고, 다른 금융회사가 대출을 회수하면 함께 거둬들이는 주먹구구식 대출 관행이 널리 퍼져 있다. 금융회사들이 돈을 빌려줄 때 정황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기업의 기술력이나 사업성, 재무 구조에 대한 평가는 뒷전이다.

A은행 관계자는 "어느 은행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 다른 금융회사들도 경쟁적으로 자금을 거둬들이기 때문에 해당 기업에 대한 재무 분석이나 상환 능력 점검은 중요하지 않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B은행 부행장은 "한국에서는 비 올 때를 잘 예측해 누가 먼저 우산을 빼앗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털어놨다. 돈을 빌려줬다가 부도 조짐이 있으면 다른 금융회사보다 한발 앞서 돈을 빼는 것이 최상의 대출 관리 정책이라는 얘기다.

서울에서 전광판 사업을 하는 박모(41)사장은 "아무리 유망한 사업거리가 있어도 국내 은행들이 먼저 따지는 것은 금융 거래 실적"이라며 "대형 금융회사와 거래한 사실이 있어야 돈이 나가기 때문에 최초에 은행의 문턱을 넘는 과정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이처럼 은행들이 유망 기업을 발굴하는 데 소극적으로 나선 결과, 지난 6월 말 기업대출이 가계대출에 사상 처음으로 추월당했다. 이는 주택담보대출처럼 떼일 염려가 적은 가계대출에 치중한 결과로 중소기업은 만성적인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는 중소기업 대출 비율을 시중은행은 45%, 지방은행은 60%까지 의무화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금융연구원 이병윤 연구위원은 "은행들이 기업 신용도에 따라 대출금리를 차등화하면서 기업 대출을 늘리려면 대출 심사 능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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