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스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80년 4월 「사르트르」 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의 한 잡지는 앞으로 누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이겠느냐는 여론조사를 했었다. 이 때 뽑힌 3인이 구조주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 ,작가 「유르스나」 여사, 그리고 「레몽·아롱」이었다. 바로 그 「아롱」 마저 타계했다.「아롱」의 생애는 「사르트르」 와의 관계에서 잘 조명된다.
「사르트르」 와 「아롱」 은 1905년생 동갑나기였고 파리고등수범학교의 동창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상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고 평생을 철학상의 구적(구적)으로 지냈다. 「사르트르」 가 격렬한 용어와 전투적인 앙가지망으로 부르좌적 유산을 공격하는 동안 「아롱」 은 미국과 산업사회를 옹호했다.
전자는 고인의 자유를, 후자는 시민의 자유를 외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아롱」의 55년 저서 『지식인의 아편』 은 사상과 비판의 자유가 결여된 소비에트사회와 좌파 지식인을 공격했다. 「사르트르」 는 66년 「지식인의 옹호』 를 통해 『온건파는 권력에 봉사하는 가짜 지식인』 이라고 공박했다.
전후 새로운 정신질서를 모색하려는 지식인들에게 「사르트르」의 목소리는 크게, 「아롱」 의 목소리는 작게 들린 것이 사실이다.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80년 베트남의 보트 피플(난민) 을 구출하자는 모임에서 함께 서명한 것이 고작일 정도.「아롱」 은 타계 직전에 저술한 『회고록-50년간의 정치회상』 에서「사르트르」 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그러나 『어떻게 평생에 걸친 이견을 해소할 수 있겠는가. 그는 나를 무수히 모욕했다. 그도 화해를 원치 않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 말한다.
그런「아롱」 이 회고록의 에필로그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3명의 친구 가운데 첫번째로 「사르트르」 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존경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사회학자·정치학자·언론인.「아롱」 의 생전 타이틀들이다. 청년시절엔 레지스탕스와「드·골」의 자유프랑스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가 산업화를 옹호한 것은 비록 부작용은 있으나 이것을 통해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민의 자유 가운데 사상과 비판의 자유를 가장 중요시했다. 서구문화의 원천은 바로 이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아롱」 은 이런 자유의 유무를 기준으로 권력을 「입헌적· 다원적 정권」 과 「독점적 정당정권」 으로 대별했다.
그의 사상은 「드·골」 「퐁피두」 「지스카르-데스탱」 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우파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키신저」 도 그를 『나의 스승』 이라고 불렀다. 「미테랑」 의 집권으로 이제야말로 소신에 찬 그의 목소리가 커질 즈음 「아롱」 은 갔다. 정말 프랑스는 양심의 스승이 필요한 때에 그를 잃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