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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임대아파트 가꾸기 나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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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무 몇 그루와 쓰레기만 있던 자투리 땅(사진아래)을 영구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생태공간(사진위)으로 바꿨다. 서울 강서구 가양4단지 임대아파트 내 생태공간에 생긴 실개천에서 4일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12년 전 이사 올 때는 어떻게 하면 빨리 이사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사 갈 일이 생길까봐 겁날 정도로 이곳이 좋아졌습니다."

서울 강서구 가양4단지 영구임대아파트 주민 표성옥(58)씨의 말이다. 그가 10평 남짓한 자신의 아파트에 이처럼 애착을 갖는 까닭은 얼마 전 새로 만든 생태공간 때문이다.

이달 초 완성돼 5일 개장식을 하는 가양4단지 녹지공간에는 잠자리들이 쉬어 가는 습지, 하루종일 물이 흐르는 실개천, 주민들이 흙을 밟을 수 있는 산책길이 들어섰다.

녹지 곳곳에는 억새.물레나무.패랭이꽃 등을 심었다. 물 위에서는 소금쟁이가 원을 만들고 산책길 돌 틈새에는 지렁이가 살고 있다. 320평 남짓한 이 생태공간은 아파트 주차장 한쪽에 버려져 있던 공간을 새롭게 만든 것이다. 예전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는 어둑한 곳이었다.

아파트 주민 가운데 표씨 등 26명은 2월 '주민 참여로 행복한 4단지 만들기 위원회'를 만들어 올해 봄.여름 내내 생태공간 조성에 매달렸다. 주민들은 동사무소.구청.구의회.시의회 등에 2 ~ 3일에 한 번씩 찾아가 임대아파트 내 생태공간 조성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주민들이 모여 생태 공부를 하고 '한국 도시 비오톱(소규모 생물서식공간) 연구센터'에도 자문했다.

주민 구선옥(48)씨는 "'임대아파트=낙후한 곳'이라는 인식을 바꾸고 싶어 남편에게 살림을 내맡기다시피 하고 생태공간 조성을 위해 발 벗고 뛰었다"며 "정원은 부자 아파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손으로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노력한 결과 한국녹색문화재단은 5월 '도시 내 소규모 생물서식공간 조성사업' 중 하나로 가양4단지 생태공간 사업을 선정했다. 공사비 7000만원도 지원하기로 했다. 녹색문화재단 사업지원팀의 홍수장 대리는 "가양4단지는 아파트로선 유일하게 우리 문화재단의 사업 대상이 됐다"며 "서울시.고양시 등의 지자체와 임대아파트가 나란히 선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주로 기업 건물의 옥상에 생태공원을 조성해 오다 가양4단지 생태공간 조성을 맡은 ㈜한국 도시녹화의 김철민 대표는 "처음 임대아파트에 생태공간을 만든다고 했을 때는 생경했다"며 "하지만 도시생활에 지친 영세민들에게 쉼터가 되는 녹지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애착이 갔던 작업"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공사 기간 중 매일같이 막걸리.부침개 등 새참을 준비해 일꾼들을 격려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이들은 5일 생태공간 완성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앞으로 당번을 정해 생태공간의 청소.관리를 맡을 예정이다. 주민 모임을 돕고 있는 가양4종합 복지관의 정성원 과장은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노력해 결실을 본 좋은 사례"며 생태공간 완성을 축하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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