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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의열단(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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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상옥 의사의 줄기찬 항일투쟁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최후가된 삼판포사건은 경성의 거대한 일경과 단신으로 맞서 그토록 긴 시간을 항전했다는데서 민족의 긍지를 일깨웠고 총독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일본은 종로경찰서 폭탄사건도 김상왕의 행동으로 조사후 확인했다. 그렇지만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다.
같은 의열단원이던 유석현의 회고. 「김상옥이 상판통사건으로 자결하자 일정은 그를 종로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종로서 투탄사건은 다른 사람이 했을 가능성이 있다.
독립운동하던 사람중에 김응환(당시 24세)이 있다. 그는 황해도 해주사람으로 길림성 유하현에서 농사를 지었다.

<종로서 폭파엔 이견>
나는 그때 「백광화사건으로 일정에 쫓겨 돈의동에 피신해 있었다. 백문화사건이란 나와 김시영·김정섭 등 3명이 당시 판사였던 백윤화를 찾아가 독립운동자금을 뺏으려던 것을 말한다. 백윤화는 우리를 일경에 밀고했지만 동지였던 황옥경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몸을 피했다. 종로서 사건당일 저녁 나는 낙원동 소재 이우경씨가 경영하는 제과점으로 가고 있있다. 이우경의 재과점은 독립운동의 아지트 적으로 그는 숨은 애국자였다. 그런데 길에서 김용환이 손수건에 무엇을 싸들고 가는데 무거워 보였다.
김과는 평소 안면이 있어<여기(서울)에 왠 일이시오>하고 묻자 그는 웃으면서<일하고 갈랍니다. 위험하니 빨리 이곳을 피하시오>했고 손에든 물건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그 물건이 폭탄이라 짐작하고 헤어졌는데 그는 종로서 쪽으로 걸어갔다.
제과점에서 동지 남정옥과 만나 인력거를 타고 창경원 박석고개를 넘는데 종로서 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시계를 보니 하오 8시8분이었다.
김은 그 길로 상해로 도주했고 그 이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일경은 김상옥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쫓다가 그가 자살하자 그를 범인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경찰에서는 확증이 없어 모호한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는 바람에 심지어 자기가 했다고 자백한 사람도 여렷 있었다.
또 종로서 사건때 투척된 폭탄은 중국제인데 비해 의열단원들은 독일인 「마르틴」이 제조한 폭탄을 사용했다. 김상옥은 귀국당시 권총만 갖고 있을뿐 폭탄은 없었다. 김응환이 비록 의열단원도 아니고 무명애국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종로서사건이 누구의 행동이었는지는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삼판포사건을 일으킨 김상옥의 애국적 생동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김의사의 2세 김태운(의료보험조합·청수과장)은 유씨가 말하는 사건은 이듬해에 있었던 두 번째 종로서 투탄사건이 아닐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종로서 투탄은 김의사가 아니리라는 유씨의 기억은 음미할만 하다.
의열단에서의 김상옥의 위치나 투쟁경력으로 보아 그 무혐의 그의 국내 잠입목적은 종로서 폭파보다는 훨씬 더 무거운 사명, 이를테면 총독부를 겨냥한 테러였으리라는 얘기다. 의열단은 공작을 수행할 때 현지에서 조직을 보완하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김상옥은 총독부 요인 암살을 목표로 준비를 하던중 예기치 않은 종로서 투탄사건이 났고 이로 인해 일본경찰의 사찰이 강화되고 마침 의열단의 국내 잠입정보도 입수·추격하던 끝에 김의사의 소재를 탐지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리다.

<제2자 암살계획(황옥경부사건)>
의열단은 수차의 테러활동에서 다소의 성과를 얻자 23년초 조선총독부와 총독 「사이또」, 정무총감 「미즈노」조선은행등을 대상으로 대암살·파괴공작을 추진했다.
이 사건은 현역 정부였던 황옥이 김시현·유석현 등과 함께 폭탄을 국내에 반입함으로써 일제의 충격을 더해준 사건이다.
의열단의 그 동안의 테러활동에서 폭탄의 성능이 약해 실패한 것을 교훈으로 고성능 폭탄제조에 나섰다. 폭탄제조에는 독일·이탈리아 등의 기술자가 참여했고, 특히 헝가리인 「마잘」이 대량제조작업을 맡았다. 의열단은 이를 위해 상해의 프랑스조계지에 양옥을 얻어 한국인 이동화·현계옥 등이 폭탄제조를 도왔다. 현계옥은 대구 기생출신으로 나중에 모스크바대학까지 나은 여걸이다.
의열단은 이렇게 제조한 고성능폭탄과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 「조선총독부·관공리에게」등의 비밀 전단물 국내에 반입했다.
이 사건에 직접 관여했던 유석현의 증언.
『경기도 경찰부의 황옥 경부는 경찰에 처음 몸을 담을 때부터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실천에 옮길 사람이다.
그는 진주지방법원 검사국서기로 10년간 근무했고 승진해서 평양고등법원 검사국서기로 일했다. 이때 평양고등법원의 관사였던 홍진과 알게됐고, 홍이 변호사로 개업했을 때도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3·l운동이 일어나자 홍진은 황옥에게 상해로 같이 가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막상 상해로 망명했지만 홍진은 임정요인들과 친했으나 황옥이 검사국서기로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밀정으로 오해를 받았다.

<테러위해 경찰투신>
황옥은 계속 상해에 있다가는 독립군에게 암살될 것 같아 홍진과 약속하고 국내에 들어와 경찰에 투신, 독립운동을 은밀히 도왔다. 그는 총독부에 상해 임시정부등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첩보했고 감사국 근무경력을 인정받아 정부로 특채됐다. 황옥이 의열단과 접선된 것은 의열단원 김시현과 원래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김시현·김지섭이 백윤화판사에게 군자금을 얻으려 할 때도 막후에서 정보를 제공했다. 때마침 김상옥의 삼판통사건과 종로서 사건이 터지자 황옥은 나를 포섭한 것처럼 가장, 의열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나를 데리고 상해로 가겠다고 총독부에 보고했다. 나와 김시현은 백윤화사건으로 일경에 좇기고 있을 때라 황옥의 계략으로 여권까지 받아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다. 황옥은 약산과 만나 의견을 나누고 정식으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폭탄의 국내반입에는 황옥의 공이 컸다. 그가 현역 정부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별달리 의심받지 않고 폭탄의 국내반입에 성공했으나 동지로 믿었던 권태일의 밀고로 발각됐다. 권은 원래 준의열단원인 조황과 의병을 일으켰다가 무기징역을 받았고 합방때 사면됐다. 그는 3·1운동 때는 시위에 가담해 8개월의 징역도 살았다.
그랬지만 경기도 경찰부 「가와사끼」정부보와 내통이 됐다. 조황은 이를 모른채 권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것만 믿고 폭탄을 권의 김에 맡겼던 것이다.
기록에는 김재진이라는 사람이 밀고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권태일과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수 없다. 당시 경찰은 권의 신변보호를 위해 「김두형」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김재진 역시 권태일의 다른 이름인것 같다. 권태일은 해방후에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사건이 나자 조선총독부는 현역 경부가 이 사건의 주모자였다는 점에서 여지없이 체면이 깎였다. 그래서 총독부는 황옥에게 의열단을 한꺼번에 체포하기 위해 폭탄의 국내 반입에 의도적으로 개입했다고 진술할 것을 협박했다. 황옥은 80노모에다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일제의 위협에 못이겨 일제의 지시대로 진술했다.
나는 경기도 경찰부 감옥에서 사흘이 지나도록 황옥이 안보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진술과정에서 황옥을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았다.
그것은 현역 정부의 독립운동 참가사실이 국내외에 선전효과가 크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예심판사는 나의 진술과 장옥의 진술이 다르자 두 사람을 대질시켰다.
황옥은 나를 보자<자녜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나. 왜 나를 끌고 들어가나. 80노모가 있는데…>라고했다. 그래서 나는 <형님, 지금 구명도생하면 전가족이 욕되게 삽니다. 형님이 설사 살아난다 해도 형님과 가족들까지 의열단에서 모두 죽일 것>이라고 하고 황옥에게 떳떳하게 행동할 것을 설득했다.

<김시현, 감옥서 27년>
그러자 황옥은 묵묵히 듣기만 했고 예심판사는 황옥이 내 주장에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유죄를 인정했다. 황옥은 나중에 울면서<역시 자네말이 옳았어>라고 했다. 그는 해방후 장택상 밑에서 경북치안책임자로 일하다 남북됐다.
이 사건으로 김시현·황옥 12년, 유석현 10년, 유시태 5년 등 모두 12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김시현은 그후에도 수 차례 투옥돼 모두 27년의 형을 살았다. 김시현은 유시태와 함께 해방후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다. 그가 이승만을 죽이려 했던 것은 「남북분단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경 이등기 폭파사건>
23년9월 동경대지진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인들의 공포와 분노를 달래기 위해 한국인을 속죄양으로 삼았다. 그 결과 6천명 이상의 한국인이 정치적 제물로 희생됐다.
의열단은 동경대지진에서 희생된 한국인의 복수를 위해 김두섭을 동경으로 밀파했다. 24년초 일본국회에 참석하는 조선총독등 일제의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김지섭은 24년1월4일 동경에 도착했으나 때마침 제국의회가 휴회중이였기 때문에 장성을 폭파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는 1월5일 상오 7시 황성에 갔으나 경비가 삼엄해 접근하지 못하고 황성입구의 이중교 앵전문에 3발의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모두 불발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법률의 정신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나의 행동은 한국인의·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하고 무죄가 아닐 바에는 사형을 당하는 것이 떳떳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무기형을 받았고 복역중 28년 옥사했다.

<나석주의 동척·식은폭파사건>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은 일제 경제침탈의 원흉이었다. 나석주는 황해도 대령출신으로 의열단고문 김창숙의 권유로 거사에 참여했다. 당시 의열단고문에는 김창숙 외에 김구·김규식이 있었다.
24년에서 25년에 걸쳐 황해도 재령군 북속면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의열단은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동척과 식산은행의 폭파를 추진했다. 나석주가 이 임무를 맡은 것은 그가 이곳 조선총독부 소작지 소작농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석주는 국내에 들어오기 한달 전부터 총독부와 경찰국에<아무날 내가 들어간다><어느 곳을 폭파하겠다>는 협박편지를 보냈다. 일경은 국경 요소요소에 군경을 배치하고 수사를 폈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경계를 풀었다. 나석주는 한달 간의 신경전 끝에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인천에 도착했다.
26년12월28일 하오 2시쯤 나석주는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곧장 동척으로 달려가 권총을 난사하면서 폭탄을 던졌다. 그는 토지개량부 기술과장 능전풍, 잡지기자 고목길강 등을 쏘아 모두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는 일경에 포위되자 동척앞 전신주 밑에서 자신의 복부를 총으로 쏘아 자결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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