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루트 1만km] 13. 탈라스 대평원서 '통한의 눈물' 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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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의 초원과 마을 입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독특한 이슬람식 공동묘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처럼 보이는 묘지 앞에 죽은 자를 위로하듯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망자의 흉상을 세워 놓은 곳도 많았다. 조용철 기자

위구르족의 신식 결혼식 문화. 신혼부부가 온통 꽃으로 장식한 승용차를 타고 카스 시내를 달리고 있다.

인류의 최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는 종이다.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을 발명한 이는 후한(後漢)의 환관이었던 채륜이다.제지술은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서방 세계에 전파되었다. 서기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 군대와 당나라에서 파견된 고선지의 군대가 실크로드(비단길)의 패권을 놓고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탈라스 평원에서 맞붙는다. 중앙아시아 일대의 운명을 결정한 탈라스 전투다.

우리 여정의 종착점이 바로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던 카자흐스탄이다. 종착점을 그렇게 잡은 연유는 잊혀진 탈라스 전투를 기억하며, 그를 통해 종이가 서양에 전해진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종착점은 새로운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반도와 유라시아를 잇는 신실크로드이자 21세기 고선지 루트가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탈라스 전투에 관해선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도 기록돼 있다.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이 아랍의 연합군을 결성해 안서도호부를 공격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한 고선지가 반격에 나섰다. 두 세력은 탈라스성에서 대치해 닷새 동안 전투를 벌였으며, 고선지군 내 케르룩 출신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대식국군과 협공하는 바람에 고선지가 패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타림분지 서쪽이 이슬람화한 것은 고선지 군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패하지 않았다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고선지 이후 중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에서 오슈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로 쭉 가면 탈라스강이 나온다. 비슈케크에서 남서쪽으로 190여㎞ 떨어진 지점이다. 탈라스강으로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니 고선지 당시의 격전 상황이 12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일행의 눈앞에 다시 펼쳐지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비슈케크에서 오슈로 가는 완만한 내리막 길 양옆에 펼쳐진 유목생활의 모습은 이방인인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초원과 나무와 동물과 인간이 자연이라는 큰 이름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말이나 소는 지키는 사람이 있건 없건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끼리 수십, 수백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한 목동이 200~300마리의 양을 몰고 다니기도 했다. 바로 옆에 세운 유르탕(유목민 천막)은 초원의 일부가 돼 있었다. 거기에 톈산산맥의 눈이 녹아 쏟아내는 카랑카랑한 물소리가 더해졌다. 아, 인간이란 무엇이고 문명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는 그저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선 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탈라스 전투의 여파는 인류 문명이 진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고선지 장군의 부하 중 종이 만드는 기술자가 이슬람군의 포로가 됐다. 그가 아랍권에 전한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전해졌다. 이 같은 사실은 아랍 장군 이븐 살리의 포로였던 두환(杜環)이 당나라로 귀환하면서 알려졌다. 두환이 쓴 '경행기(經行記)'에 의하면, 당나라에 포로가 된 고구려인이 당의 노예가 된 것처럼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 군사도 모두 사라센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비단과 명주 베틀을 만드는 사람, 금.은을 다루는 사람 등 중국의 장인들이 아랍에 동양의 신기술을 전수했고, 사마르칸트로 보내진 중국 제지공에 의해 제지공장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중심지 사마르칸트에서 제지술은 다시 바그다드로 전파되고 드디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대략 1300년께다. 제지술 전파는 종이의 대량 생산을 가져왔다. 나아가 지식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게 함으로써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유럽의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바로 1300년대 후반부터 일어났음을 세계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키르기스스탄에서는 공동묘지가 자주 보였다. 그들만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보여주었다. 마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이 만들었다. 어떤 공동묘지는 실제 마을보다 더 훌륭하게 꾸몄고, 무덤 속 주인의 흉상까지 만들어 놓기도 했다. 흉상을 놓지 못할 경우엔 생전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하는데, 수백년 아니 수천년 전의 유목민 마을로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가 없었다면 그같은 착각은 더 지속됐을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 검문소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키르기스스탄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경탄의 느낌을 싹 가시게 했다. 터무니없는 '통과세'를 요구한 것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 국경 통과를 시도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여권을 보는 순간 부자나라로 생각하여, 마치 고선지 시대 실크로드의 도적들이 통행세를 물리거나 약탈했듯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가. 어이없는 상황을 반복하는 가운데 날이 새고 말았다. 날이 밝아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돈을 요구할 수 없게 되니까 그제서야 겨우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안젤라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당초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고려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최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해 사망자가 생길 정도로 치안이 좋지 않다고 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즈베키스탄 검문소에서도 돈을 요구하는 상황이 또 벌어졌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초소가 있는 곳마다, 교통경찰이든 군인이든 통행료를 강제 징수하기 일쑤였다. '21세기에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은 자꾸 지체됐다. 엉뚱한 사태로 인해 고된 하루였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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