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0) 제80화 한일회담(29)유진오-극빈 교포 퇴거문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재일한인 법적지위위원회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일일이 다 기록하기는 어렵지만 몇가지 중요한 쟁점들에 대한 협의과정을 좀 자세히 설명해볼까 한다.
우선 재일동포들의 영주허가와 관련된 강제퇴거 문제다.
일본정부는 종전후「생활보호법」이란 것을 만들어 그들 국민중 생계가 어려운 극빈자들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바로 이 생활보조금 수혜대상자 가운데 일부 극빈 재일동포들이 식민통치 아래서의 내국인취급 관행에 의해 끼여 있었다.
일본측 설명으로는 생활보조금을 지급 받고 있는 재일한인이 6만여명에 이른다는 얘기였다.
일본정부는 이 6만여명의 빈곤 재일한인을 점자 강제 귀국시킨다는 방침이었고 다만 일본정부의 생활보조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할 경우에만 강제퇴거를 안 시키겠다는 꼬리를 달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이들 재일한인 구호대상자에게 50년 한햇동안 6억6천만엔의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한국이 독립정부를 세운 이상 한국정부가 자국 국민보호를 책임져야한다는 논리였다. 나는 일본측의 강제퇴거 운운 발언에 대응해『강제로 데려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강제로 내쫓으려고 하느냐』고 쏘아붙였다.
그랬더니 한 일본대표가『당신들도 종전 후 재한일인들을 강제로 쫓아내지 않았느냐』고 시비를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당신들은 침략자지만 우리 재일동포는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라고 반박했다.
또 김동조대표(당시 외무부 정무국장)도『재한일인들은 종전후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귀국한 것이며 우리정부는 그들을 단 한사람도 강제추방 한 적이 없다』고 그들의 억지를 나무랐다.
재한일인 강제추방 운운주장은 우리들의 공박으로 슬그머니 철회되었지만 일본측은 영주권을 포기하든지, 생활보조금 수령을 포기하든지 둘중의 하나는 물러설 수 없는 일본정부의 입장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미상불 일본측 주장대로 생활보조금 수령을 포기할 경우 강제퇴거는 면하겠지만 사실상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는 극빈자들의 생활이 당장 문제가 될 판이었다.
궁극적으로 독립국가로서 재일동포들을 보호하고 도와줄 책임이 정부에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우리 정부가 워낙 가난해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일부 재력있는 교포들로부터 찬조를 받아 대사관 운영에도 일부 보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라의 체면도 있는 만큼 재일극빈동포의 생활을 일본정부더러 전적으로 책임지라고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강제퇴거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더우기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룰 경우 조련계들이 우리 정부를 비방하는 좋은 자료로 이용할 것이 뻔했다.
당시 조련계들은 가뜩이나 일본정부의 재일한인에 대한 생활보조금지급이 마치 자기들이 일본정부와 투쟁해 얻은 것인 양 선전하고 있던 터였다.
실제로 조련계가 많이 살고 있는 명고옥과 하관 등지의 재일동포들은 10명중 1명에서 4명까지의 비율로 생활보조금을 지급 받고 있었는데 조련계들은 일부러 극빈자삭를 늘려 등록시킨 뒤 그들이 타낸 생활보조금을 활동비로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들은 구수회의를 거듭한 결과 우선 다음과 같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재일한인에 대한 생활보조는 계속할 것 △생활보조를 받는 한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자립할 때까지 일정연한 동안 강제퇴거를 유보할 것.
이에 일본측은 △앞으로 1년간은 생활보조를 계속하되 △그 이후의 보조여부는 일본정부의 자주적 판단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약간의 융통성을 보였다.
나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결정짓기 어려워 경부의 훈령을 요청했다.
며칠 후 정부로부터 온 훈령은「재일동포 극빈자들이 생활기반을 닦을 때까지 생활보조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관철시키라는 것이었다.
이 훈령을 듣고 다시 일본측과 몇차례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일본측으로부터 1년이란 기한을 굳이 고집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양국 대표들은 더이상의 확실한 매듭은 지금까지의 합의내용을 본회담에 올려 결론을 짓기로 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