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829> - 제80화 한일회담(2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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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재일한교의 법적지위에 관한 논의는 다른 문제에 비해 유래가 긴 편이다.
49년5월 정환범2대대사때 논의된일이 있었고 다시 50년3월 김용주공사가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측과 토의를 가졌었다.
그러다가 5l년8월 신성모공사 부임직후 논의가 본격화돼 SCAP측 제의로 8월24일부터 SCAP에서 당시 주일대표부의 갈홍기참사관·임송본씨,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준비회담을 가졌으며 이것이 전체 주일회담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일본은 그들의 신출입국관리법이 발효하는 11월1일을 이틀 앞두고 재일한국인의 지위를 분명히 해두어야겠다는 심산으로 회담을 서둘러 왔다.
상호간의 필요성이 비교적 절실했기때문에 실제로 연말의 휴회에 들어가기까지 모두 21차례 계속된 회합에서는 쌍방간에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졌다.
원래 일본은 재일한교문제에 관해 별로 성의가 없었고 다만 재일한인이 한국국적을 가졌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인식시키고 평화조약발효후에 「외국인」 으로 취급해 일반외국인에 가하는 모든 제한을 재일한인들에게도똑같이 하려는 심산이었다.
이에대해 우리측은 재일한인은 일본에 있어서 특수한 지위를 정하는 외국인임을 지적, 일반 외국인과는 다른 우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측은 이러한 우리의 주장에 대해 「무리한 요구」 라고 내외에 선전함으로써 그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이끌려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공박했다.
『한국은 결코 모든 재일한인에게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45년 8월9일 이후에 일본에 입국한 한국인에 관해서는 일반외국인 대우를 해도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은실제로 일반 외국인과는 다른 역사적으로 특수한지위를 갖고있다.
우리는 일본에 있는 재일한인들을 한번도 한국인이 아니라고 한적은 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바로 당신들 입으로 내선일체 운운하면서 무고한 한인들을 징발해오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재일한인들이 특수한 지위를가지고 있는 이유다』
재일한인의 국적문제에대한 일본측제안은 이러했다.
△재일한인은 대일평화조약발효와 함께 일본국적을 이탈, 한국국적을 취득한다. △재일한인국적은 호적기준으로 결정한다. △재일한인의 일본국적취득(Naturalization)은 일본국적법에 의해 행한다.
우리정부는 이러한 일측 제안에 대해 『도대체 어떤 자연인의 국적취득은 그나라의 국내법에따라 행해질 일이지 국제회의의 의제가 될 성질은 아니다. 다만 한국정부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국민에 대해 보호권을 가지고 있으니만큼 우리가 관심을 갖는것은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처우및 법적지위문제요, 이것이 회담의 주된 논의사항이 되어야한다』 고 주장했다.
이후 국적분과위에서는 우리 주장대로 재일한인의 처우및 법적지위문제가 주로 논의되었지만 실제로는 조련계의 끊임없는 준동때문에 국적취득에도 문제가 없는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것이 「영주권」이었다. 일본은 자국의 「츨입국관리령」에 의해 재일한인으로부터 일일이 영주허가신청을 받고 △선량한 사람인가 △자립할만한 재산 또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일본영주가 일본국익에 부합하는가등을 심사해 기준에 맞을경우 1인당 일화 2천엔의 수수료를 받고 영주권을 부여하겠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해 다시 한번 재일한인의 특수위치를 설명하고 끈질긴 설득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의 재일대표기관에서 등록증명서를 발급하고 △일측은 그들의 외국인등록부와 대조해 △45년8월9일이전부터의 거주자인것만 확인하면 △다른 심사를 거지지 않고 △수수료도 없이 영주권을 부여하기로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이런 대강의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회담이 시작된 10월30일부터 다음해인 52년4월까지 6개월간 모두 36차례의 회합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나의 상대인 일본측의 「다나까」 대표는 비교적 합리적인 태도로 회담에 임했고 우리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경청해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몇차례인가는 합의를 해놓고나서 본국정부로부터 사후 승인이 나지않는다는이유로 철회를 요청하는 촌극을 빚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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