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안에서 대접받는 국민은 밖에나가서도 대접을 받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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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서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려 닿을수 있는 신선봉 (충북괴산군연풍면원풍이)은 태백에서 소백이 갈라지는 분기점으로 제법 울울한 선경을 이루고 있다. 그아래 초가을 한낮의 매미소리가 요란한 김옥길이대명예총장댁의 잘 정돈된 정원엔 봉숭아·맨드라미·샐비어·분꽃이 한창 피어 손님을 맞는다.
80년5월 문교장관직을 물러난후 문경새재 총장할머니란 이름의 야인으로 돌아간 김명예총장. 말없는 자연처럼 그동안 주장도 의견도 삼가오던 그가 중앙일보 창간18주년을 맞아 본사 최종률논설주간과 함께 물처럼 흐르는 세상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옥길=먼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최종률=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 이처럼 꽃이 많고 갈 정돈된줄은 물랐습니다. 가을꽃이 한창이군요.
김=시골이기 때문에 시골답게 소박한 꽃들을 심었지요.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은 어렸을때 우리네 마당의 꽃이기도하고 또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기도 합니다.
최=산책길이신듯한데 동네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등산모를 쓰고 단장을 든 김명예총장은 산책하다가 손님이 오는것을 내려다보고 마중을 나온참이라했다).

<"긍지"얻을 여건 조성을>
김=무관하게 드나드는 편입니다. 내가 새벽4시쯤 일어난다는것을 알고 있어서 새벽부터찾는 사람도 있어요. 며칠전 나이든 부부가 아들이 퇴학을 당했다며 호소한 적이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퇴학정도까지는 아닌것같아 그날로 음성에 있는 학교를 찾아갔어요. 말이란 전하기에 따라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은 이곳 고사리마을에서 음성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많은 문제가 생기므로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해주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부모는 학교에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오해하기만 한 것입니다. 내가 중간에 들어 그 학생을 가까운 학교로 옮기게 했읍니다.
최=대화라는것이 그래서 필요한것같습니다. 그 학생과 부모의 경우 대화를 시도했다면 오해없이 해결되었겠지요. 이처럼 대화도 해보지않고 먼저 오해부터하는 경우가 세상에 많습니다. 또 설혹 대화를 한다고해도 도덕적기반이 일치하지 않거나 전시효과로만 시도된것이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는것같습니다.
김=자, 그럼 우리 대화를 나누기위해 이곳에 앉아 봅시다 (바위밑마다 삽질을해 계곡으로 물길이 닿게해 놓은 개울가에 아담한 정자가 있고 하얀 페인트 칠을한 쇠의자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대화란 말입니다. 같은 문제에 접근하려는 성실성이 있어야 좋은 걸과를 낳게됩니다. 공통된 이익을 위해 대학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부터 생각하고 마음을 열어놓지 않는다면 대화의 의미가 없는것이지요. 참석한 사람이 제각각 딴생각을 하고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최=대화해 보려고 노력도 하지않을뿐더러 대화를 하더라도 핵심에의 접근을 회피하려는 자세, 이 두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할것 같습니다. 학교 이야기가나왔으니 생각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학생을 받아들이는 교육이 아니라 밀어내는 교육인것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교육에 포용력이 없어요. 여기서 학원의 불안요인도 생기는것같고-.

<사랑해본 사람이라야…>
김=교수의 입장이란 학생과 무엇을 책임있게 털어 놓을수 있어야 하는것아닙니까. 공감도 있고 반박도 있을수 있어야 사제지간에 끈질긴 유대가 생기는 것인데 교수의 이미지가 월급 몇푼에 매달리고 그 월급액수로 평가된다면 교육에 기대할것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인격과 긍지를 박탈해 놓고 학생을 가르치게해서는 안됩니다. 교수는 긍지로 살아야 합니다. 그 교수를 문책하고 엄벌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한다면 긍지를 어디서 얻습니까.
최=학생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것에 긍지를 가져야겠는데 점수따는것이 목적이되고 보면 그 긍지 찾기가 어렵지요. 교수나 학생뿐 아니라 우리사회 모든 분야에서도 기능이 너무 존중된나머지 긍지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생긴것 같습니다. 막상 누구에게 긍지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있다」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될까 의심스럽습니다.
김=긍지란 상호존중과 대접에서 얻을수 있습니다. 저의집에서 대접 방아야 나가서 대접받는다는 말이 있지요.
집안에서 사라 받아야 밖에서도 사랑받을수있고 또 사랑할 줄도 알게됩니다. 집안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나가서도 사랑받지 못할뿐더러 또 사랑할줄도 모릅니다. 학교도 규모가 큰 하나의 집이지요. 학생이 학교에서 대접 받아야 사회에서도 대접받아요. 마찬가지로 나라안에서 국민이 대접받아야 그 국민이 밖에 나가서 대접 받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대접받고 대접할줄 알아야합니다.
최=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엔 정말 말이 너무 풍성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많은 말가운데 말같은 말은 드물고 믿을 수 있는 말도 어느정도인지 가늠을 할수도 없어요.
김=하늘아래 새말이 없다고 전도서에 쓰여있읍니다. 말이란 책임을지고 약속을 지켜야 생명이 있게마련입니다. 말로써 끝나는 말이라면 의미가 없지요. 문법적으로 「아니」가 두번 겹치면 긍정이 되는것 아닙니까. 요즘 사람들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는 경향이 많은데 「아니」는 한번으로 족해야 합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지요. 정치인들이 신년에 하는말 있잖아요. 한번쯤 자기가 한 말에 얼마나 책임지고 성실히 일했느냐, 그리고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느냐를 체크해 봤으면 하는 것 말입니다.
우린 무언가 자꾸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말을 한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말입니다. 하지만 한번 한말은 어딘가에 살아있어 잊어버려지지않고, 없어진것 같으면서도 그냥있으며 묻힌것같으면서도 드러나 있는것입니다.
최=가끔 독자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내가 언젠가 썼던 기사의 한구석을 들추어내는 때가 있어요. 이럴땐 「열심히 우리를 지켜보는게 있구나」라는 두려움이 생기고 자신에게 충실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한말에 대한책임도 중요하지만 요즘 세상엔 불신이 너무 많은것 같아요. 자칫 순수, 그 자체를 못믿는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하느님은>
김=그건 순수함이 여러가지 목적으로 이용당한 예가 많아서 그런것 같아요. 그 순간만을 갈 넘길수있는 거짓말이 쌓이면 정말 어려운 고질인 불신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예를들어 정부의 업적만 강조하느라 공장의 굴뚝수만 늘려온 정부가 있다면 그 정부이후 커다란 공해문제가 생기지요. 영원의 상징인 국가를 진심으로 위해서 일을 했다면 공해문제가 생기지 않겠지요.
최=공해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것이 있읍니다.
얼마전 독일엘 다녀왔어요. 그곳 뮌헨시의 중심가에 우리청계천만한 내가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맑을뿐더러 큼지막한 고기들이 떼지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호수를 인공으로 만든것이 많았는데 정말 서울과는 차원이 다른 도시계획을 실감하고 왔읍니다.
서울의 많은 개천과 냇물에 뚜껑이 덮여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나라들은 파서 열어 젖히는 행정을 하는데 우리는 자꾸 덮고 닫아버리는 행정을 잘하는 일로 압니다.
김=서울의 도시계획 하나에서도 얼마나 진실을 바탕으로한 행정이 있었나를 측정해 볼수있지요. 언론은 이런점을 부단히 지적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요즘같은 시대에 종교의 역할도 크다고 믿습니다. 그 종교란 감동에서 출발하는것 아닙니까. 감동도 믿음도 없어져가고 있는 시대에 과연 종교가 어떻게 역할할수 있을는지요.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약 70%가 종교를 가진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와 정비례해서 사회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같아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김=성경에 보면 초대교회에도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이적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간다는 그 자체에서 기복이나 축복을 무시할수는 없읍니다. 하지만 종교가 세상의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기 위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현대에 하느님은 죽었다고 곧잘 말하지요. 나는 이 말을 들을때마다 하느님은 갈 죽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느님이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주고 그 사람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하느님이라면 죽어마땅하다는뜻입니다. 우리가 따르려는 하느님은 그분의 큰뜻이 있고 그 뜻에 따라 인류가 여기에 순종해야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병을 낫게하거나 부자가 되게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역사를 주장하시고 인류에게 예수의 길을 요구하십니다. 연보를 많이내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최=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교회가 교인에게 사명을 불어넣는것에는 인색하고 기복을 원하는 사람만 끌어들이고 있는것 같아요. 사명을 주고 그 사명으로하여 보람이나 긍지·용기·희망을 갖게해야 되는것 아닙니까.

<능력보다 기회를 더 탐내>
김=못된 소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하지않습니까. 그같은 교회가 커지고 드나드는 사람의 수와 연보액수가 커져 눈에 띄니 교회전체가 그런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자기소임을 다하고 들녘에서 애쓰며 그 소득을 나누어 교인을 돌보는 목회자도 많다는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은 소수이며 또 나타나지 않아 눈에 띄지 않을뿐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희망을 걸수있지요.
최=기복이란 행복의 기준을 물질이나 소비현상에 두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행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현대에는 행복의 의미가 소비를 많이할수 있는것으로 변질되고 있는것 같아요.
하지만 행복이란 변질될수도 없는것으로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것이지요. 예수님도 천국을 네마음속에 있다고 하셨읍니다.
최=우리 역사를 보면 자랑스러운 것이 많아요. 우수한 창의력이나 뛰어난 진취성, 착한 성품등, 또 70년대에도 보았지만 그 근면성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보면 사회의 엘리트계층이라고나 할까 그들의 냉소주의·책임회피·무관심등이 오늘의 결과를 빚은게 아닐까요.
김=우리에겐 그동안 그들에게 좋은 기품을 잃어버리게 한 기간이 있지 않았읍니까. 그들에게도 좋은 기품이 길러질 때가 오리라 믿습니다.
얼마전 조카 세아이가 왔는데 3일 정도는 먹지 않을까 싶었던 음식이 하루만에 없어져 버립니다. 한창 먹는 나이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도둑질이라도해서 먹이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런걸 보면 어떤 사람은 잘살고 어떤 사람은 못사는 세상이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의 세상은 누구나 잘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너만 잘되어라」「너는 이겨야 된다」로 길러져왔고 또 그런걸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성실함보다 하루아침에 될 일이 무엇인가를 찾게 되었읍니다.
최=그래요. 요즘 사람들은 능력보다 기회를 더 탐하지 않나 싶습니다. 낚싯대를 가지고 낚시하는 법을 배우려하지않고 잡아놓은 고기만 탐하는것처럼. 그래서 낚시하는 수고를 우습게 여깁니다. 또 자기직업을 천직으로 생각지않고 기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직업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믿어야하지 않습니까.

<자주적인 판단능력 흐려>
김=내가 대학에 있을때 외직을 가졌던 사람을 고집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읍니다.
선생이 된다는것은 평생을 바쳐도 어려운 일언데 이것하다가 안되면 학교에 간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있을수 없어요. 학교는 쓰레기장이 아니지요. 일생을 가도 이르기 어려운 그 한길도 못가면서 이길 저길 단물만 빨아 먹어서야 되겠읍니까.
최=직업의식이 있으면 「다움」도 있게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종교인답다」「누구는 문화인답다」라는 표현 말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군군, 신신, 부부, 자자」라하여 좋은 정치는 임금은 임금이어야하고 신하는 신하여야하고 아비는 아비여야하고 자식은 자식이어야한다고 했지요. 바로 「다와야 한다」는 뜻이겠읍니다. 누구든 자기직업에 긍지를 갖고있다면 이 「다움」도 보이리라 생각합니다만.
김=그것은 그 무엇보다 사람이 제일이라는 생각과 사람을 존중해 주는데서 출발한다고 믿습니다.
최=시골생활을 하시면서 느끼신 점이나 말씀하실게 있으시면-.
김=말을 잘못하면 교만하다거나 오만하다는 평을 듣기 쉽겠지요. 그런데 한마디 하고싶다면 왜 모두들 그토록 여유가 없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말이 아닌지 모르나 무엇보다 국민이 언론을 믿고있어야 합니다.
언론을 못믿는다는 것, 특히 배운사람이 아닌 국민 밑바닥을 이루고있는 대다수 사람의 불신을 무섭게 생각해야해요.
최=그런데 선생님. 믿음을 주기만 바랄것이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믿어야한다는것도 중요한것 같아요. 믿으려하지않는 경향이 너무 지나칠 때도 있어요.
김=속았으니 그렇지 않습니까. 또 오랫동안 명령과 지시, 확인에만 치우쳐와 많은 사람이 자주적 판단능력조차 없어진것은 아닐까요. 지금까지 많은 순수함이 어떤 목적에 이용당해 오지 않았나 반성해볼 필요도 있을것같군요.
최=목적에 의한 이용물이 되었을때 본질은 없어지고 캠페인만 남는 걸과를 빚는 경우가 많았읍니다.
어떤일에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이 노력이 부족하면 목적도 추상적인것이 되어버려 유야무야가 되고 말지요.
참, 지난봄 미국과 유럽을 다녀오셨지요. 오랜만의 외국여행이셨던것 같은데-.

<해외교포들의 긍지 대단>
김=몸이 좀 불편했기때문에 큰 활동은 못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것은 내가 현직에 있을때보다 모두 서로 더 다정다감해진 것 같았습니다. 우리 교포들도 이제 많이 안정된 편이어서 애국심도 많이 자란것 같았어요.
그것이 갈 발휘되면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될것 같았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것은 제록스가게를 하고있는 교포한분의 이야기였어요. 미국·일본·한국 세나라사람이 나란히 제록스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한국인가게가 월등히 실적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그들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내세우고 한국인이 다른나라 사람에 비해 이런 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은 친절·하고 봉사정신이 강하다는것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했다는 것이지요. 그곳 사회에서 그들이 섣불리 서양사람 흉내나 낸다면 경멸이나 받았지 별수 있었겠읍니까.
긍지란 바로 이런것과도 통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사람이 귀한줄 아는 세상, 그리고 아껴주고 긍지를 가지고 살수있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최=국민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겠지요.
김=국민수준 이상가는 정부란 좀처럼 있기어렵습니다. 첫째는 무엇보다 국민의 의식수준문제고, 그 다음은 이 의식수준을 부단히 높여주려는 정치적 노력이 있어야겠습니다. 긍지란 높은 의식수준에서 각자에게 생길수있고 그 긍지에서 「사람다움」을 찾을수있지 않겠읍니까.
최=좋은 말씀 감사했읍니다.
(소찬으로 마련된 야외의 점심상에는 투명한 초가을 햇살이 더욱 해맑아 보였다.)

<정리=김징자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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