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10·26 참패' 후유증] "이런 풍파 아무것도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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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왼쪽)이 30일 오전 출입기자단과 함께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 올랐다. 노 대통령은 산행 후 10·26 재선거 패배 이후의 정국운영 방향 등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다. 김춘식 기자

노무현 대통령이 30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한 시간 반에 걸쳐 북악산 등반에 나섰다. 기자들과의 세 번째 산행이다. 이어 효자동의 삼계탕 전문 음식점에서 오찬도 함께했다. 선거 참패에다 여당 지도부 사퇴의 어수선한 와중이라 노 대통령의 표정과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등산 중 한 기자가 "잠을 잘 잤느냐"고 묻자 노 대통령은 "내가 그동안 정치 하면서 겪어온 풍파를 돌이켜보면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나뿐만 아니고 우리 정치에서 그런 일은 수없이 많았고 훨씬 험악한 일도 수없이 많았는데 다 넘겼다"고 말했다.

오찬에서도 노 대통령은 "여당 얘기는 잘된 일이라 할 수는 없지만 흔히 있던 일이고, 모든 정당이 과거 그 같은 위기들을 잘 극복해 왔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나는 그전부터 당에 개입을 하지 않았다"며 "당의 자율에 맡겨져 있었으며 이 원칙은 앞으로도 견지해 갈 것"이라고 당.청 분리의 입장을 거듭 분명히 했다.

노 대통령은 캐나다의 정치 사례를 길게 언급하기도 했다. 1989년에 169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으로 당선한 보수당의 멀로니 총리가 91년 모든 업종에 부가세를 매기는 연방부가세 제도를 추진하다 93년 선거에서 단 2석만 남기고 전멸했다는 얘기였다. 당시 경쟁 정당인 자유당은 93년 선거에 연방부가세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어 크레티앵이 압도적 지지로 총리가 됐다. 노 대통령은 "자유당은 93년 정권을 잡은 뒤 대체수단을 강구 중이라며 폐지를 미적거렸다"며 "97년에 캐나다는 멀로니의 부가세 도입 결단에 따라 결국 재정이 흑자로 돌아섰지만, 오히려 당시 자유당의 마틴 재무장관이 폭발적 인기로 총리가 됐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멀로니.크레티앵.마틴 중 누가 과연 훌륭한 지도자냐"고 반문하며 "캐나다는 그때 멀로니의 결단이 없었다면 거의 파탄상태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YS는 당시 시점에선 멋진 사람"=노 대통령은 이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안풍 관련 대선자금 사건에 대해 "그 양반이 통이 큰 사람은 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전에는 선거 잔금을 다 감춰놓고, 더 거둬서 사고가 났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 돈을 선뜻 당에 쓰라고 내놓은 것만도 훨씬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엄청난 정치자금이지만 그 시점에서 보면 김 전 대통령은 멋진 사람 아니냐"고 했다. 그는 사법처리의 시효 문제와 관련, "나는 시효 안에 있지만 도청이고 뭐고 시효 제도가 지나간 사람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시효는 옛날에 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이 만든 제도 아니냐, 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 "이 총리와 계속 일 하겠다"=이에 앞서 노 대통령은 29일 저녁 당.정.청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여당의 지도부 사퇴와 관련, "당이 정한 방향대로 가는 것이 원칙이며, 당이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이병완 비서실장이 전했다. 노 대통령은 또 "이해찬 총리가 국정 현안을 잘 추스르고 조율을 잘 해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함께) 일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당에서 내각에 와 있는 장관들의 전당대회와 관련한 정치적 결정은 당사자들이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해 정동영 통일부, 김근태 복지부, 천정배 법무부 장관 등의 조기 당 복귀 문제는 해당 인사의 의사에 맡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찬에는 당에서 문희상 전 당의장과 정세균 원내대표, 정부에서 이 총리와 정 통일, 김 복지, 천 법무 장관, 청와대에서 이 비서실장과 문재인 민정수석 등이 참석했다.

최훈.김정욱 기자 <choihoon@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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