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7) 제80화 한일회담(16) 재일교포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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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임송본씨와 나는 동경에 도착한 즉시 한일회담을 여느데 필요한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수집했다. 또 나는 일본법무성과 언론계인사들을, 임씨는 대장성과 금융계인사들을 접촉하고 일본측 태도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포문제의 내용도 조사했는데 알고 보니 재일교포는 참으로 억울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교포문제의 발단은 그들의 국적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재일교포들은 종전당시 약2백여만명을 넘었다.
이들중 해방직후 3분의 2이상은 귀국했으나 46년3월 현재 SCAP측이 등록을 받은 결과 64만명이 일본에 남아있었다.
SCAP측은 재일교포를 중국인·대만인·유구인과 함께「비일본인」의 개념으로 분류해 각자 고국에 돌려보낼 계획아래 등록을 실시했다. SCAP측의 이같은 계획은 물론 일본의 교묘한 술책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패전후 자기나라 사람들도 미처 못살아가는 형편이어서 우리동포들을 국외로 강제 퇴거시키기 위해 SCAP측을 움직였던 것이다. 일본이 그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동포의 강제퇴거를 획책해온 것은 다아는 사실이다.
당시 등록에 따르면 64만명의 잔류동포중 51만여영이 남한귀환을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SCAP측은 46년9월까지 모두 남한으로 수송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이 계획에 따라 약14만명이 귀국했으나 결국 50여만명은 일본에 남게됐다.
또 46년 미·소간에 체결된 소련지구 일본인 및 제3국인 인도협정에 따라 동포들의 북한귀환이 시작됐지만 북한귀환희망자가 적어 47년에 두차례의 선박 편을 통해 불과 3백51명이 귀환했다. 사할린동포의 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이들 재일교포들의 법적 지위에 대해 일본정부가「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자기들 유리한대로 다루고있는데 있었다.
전후처리가 관계국간의 평화조약으로 결정되는 경우에는 재일한인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평화조약으로 국적선택권을 부여받는 것이 국제간의 선례였다. 즉 한국국적을 원하는 사람은 가산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일본에 잔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본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일교포의 경우에는 대일강화조약의 체결이 전쟁종료 후 6년이나 천연되고 한국의 독립이 그 조약체결 이전에 기성 사실화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게된 것이었다.
그때 우리측은 소의「한일합병조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인의 일본국적은 우리가 취득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에게 강제로 덮어 씌웠던 굴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포츠담선언수락 (45년8월9일) 으로 한국은 이미 일본의 굴레를 벗어났으므로 한국인에게 씌워졌던 일본국적도 그 날짜로 이미 소멸되었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모든 한국인(재내·재외를 막론하고)은 한국국적을 회복했기 때문에 재일교포라해서 예외일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당연히 외국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일본은 재일교포를 한국국민으로 인정해 외국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도 대우하지 않는 몹시 모호안 태도를 취했다.『일본정부는 재일교포는 강화조약 발효때까지는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종전 직후부터 그 선거권·피선거권을 정지하고 또 47년5월2일의 외국인등록령 공포 때에는 재일한국인은「당분간 외국인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적용했다』는「일본외교사」(녹도평화연구소편)의 지적은 이점을 잘 시사한다.
즉 일본은 재일 한국인을 외국인으로 다루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한 때에는『그들은 아직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 이라 하여 일본인 같이 다투고, 반대로 일본인으로 다루는 것이 교포에게 유리한 때에는 『아니,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다』 하여 재일교포에게 외국인 (전승국인) 도 내국인 (일본인)도 아닌 제3국인 이라는 특수한 칭호를 달아놓고 때에 따라 자기네에게 편리한대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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