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항기 안전보장 국제협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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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소련 KAL기 격추사건의 사후 수습방안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이루어진것이 없다. 당사국인 소련이 KAL기를 첩보기로 우기며 피해보상을 거부함은 물론, 범행자체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의 소련규탄결의안이 소련의 거부권행사로 부결된것은 이사건에 대처하는 국제적 노력이 어쩔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음을 의미하며 자유세계의 여론이 아무리 비등해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서방 각국의 대소 취항중단이 점증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실질적으로 소련에 타격을 주어 그 완강한 태도를 변경시키리라곤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자유세계 각국의 대소요구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그것은 범행의 시인·진상해명·사과·배상·재발방지보장등이 골격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어느것도 충족되지 못한채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로미코」소련외상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세계는 이 사건을 잊게될 우려마저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는23일부터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열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총회는 전세계의 관심을 끈다. 우리는 이 회의를 통해 「국가에 의한 범죄행위 방지를 위한 항공협약」을 제정할것을 추진하기로했다.
만약에 이같은 협약이 자유세계의 노력으로 제정된다면 전세계 민항기는 설혹 불가항력적인 원인으로 타국의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그 안전운항을 국제적으로 보장받게 된다. 실로 이같은 보장은 KAL기와 거기에 탑승한 2백69명의 고귀한 인명의 희생이 국제평화의 한 초석으로 승화되는 계기도 된다.
우리가 이 협약을 추진하는 이유는 기존의 민간항공협약(시카고협약·헤이그협약·몬트리올협약·도오꾜협약)이 모두 납치나 협박같은 개인적인 범죄를 응징대상으로 삼고있어 이번 사건처럼 소련이라는 「국가의 범죄행위」에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협약이 없어도 민항기를 격추한 소련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수는 없는것이지만 국제적 보상장치를 갖추면 소련도 이에 따라야할 최소한의 양심과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사후의 국제민항 안전운항에 획기적인 일이될것이다.
소련의 KAL기격추사건 이전에도 이미 전쟁 또는 반목상태에 있는 국가의 공군기가 민항기를 공격한 사건이 다섯차례나 있었다. 특히 73년2윌21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시나이반도 상공에서 리비아 항공기를 격추한 사건도 국제적 물의를 빚은바 있다. 당시 ICAO총회는 진상조사단을 구성, 진상조사에 나섰으며 이스라엘이 국제적 압력을 받아 진상을 해명하고 보상을 끝냄으로써 그런대로 사건은 일단락된적이 있다.
소련측의 오만하고 완강한 태도로보아 이번 ICAO총회에서 과연 국가단위의 민항기공격을 근절하는 제반장치가 마련될지는 아직 의문이다. 특히 소련은 자유세계에 포위돼 있다는 망상때문에 자국의 군사시설이 배치된 지역의 상공에 대해서는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점점 좁아지는 과학문명시대의 지구촌에서 한뼘의 하늘자리를 다투며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키는것은 소련이 외치는 세계평화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일이다.
수백대의 민항기를 세계 각국에 취항시키는 소련도 이같은 국제적 대의를 최소한의 양보로나마 순순히 받아들여 차후의 민항기의 안전운항을 상호 보장하는것이 좋을것임을 충고한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선례를 따라 피해유족에 대한 보상에 응함으로써 땅에 떨어진 소련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피해당사국에 대한 최소한의 선린제스처를 보이는 원숙한 태도를 취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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