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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졸업영화제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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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허진호 감독 하면 흔히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를 대표작으로 꼽지만 내겐 더 특별하게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새것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중고차 브로커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영화다. 진한 페이소스가 일품이었다.

 계절은 겨울이었고 영화가 끝난 뒤 좁은 시장통의 좌판에서 뜨거운 어묵 국물을 넘기던 기억이 난다. 같이 간 친구는 “(허)진호가 사람도 진국이고 영화도 잘 만든다”고 했다.

 1993년 허진호 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고철을 위하여’(유영식 공동연출) 얘기다. 이날 본 영화 가운데는 그때까지 역대 졸업작 중 최고로 꼽히던 ‘호모비디오쿠스’도 있었다. 현대인의 영상중독을 예리하게 비튼 수작이다. 당시는 충무로 르네상스 이전이라 한국 영화에 이런 상상력이 있다니 놀라웠다. 이 영화를 만든 변혁과 이재용은 훗날 각각 ‘주홍글씨’와 ‘스캔들’을 만들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영화아카데미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계의 대표 사관학교였다. 봉준호·임상수·최동훈·김태용 등 스타 감독들을 배출했다. 봉준호의 실습작 ‘지리멸렬’에는 배우 김뢰하가 출연했다. 학생 봉준호의 진지한 설득에 프로 배우가 출연을 결정했고 지금까지 긴 인연이 이어진다(‘지리멸렬’의 조명은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맡았다). 그렇게 매년 열리는 졸업영화제는 그해 충무로에 진입할 새로운 재능의 보고였다. 관객들은 거침없이 질주하는 새로운 상상력에 아낌없이 박수 쳤다.

 6일 열릴 예정이던, 올해로 만 30세가 되는 영화아카데미 졸업영화제가 갑자기 취소돼 시끄럽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극장 개봉 영화와 달리 영화제 상영작들에는 사전 등급 심사를 면제해온 규정에 대해 개정을 추진하면서 불똥이 튀었다. 영화계는 즉각 반발했다. 영화제 상영작들에 대한 사전 심의, 검열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정권 비판적인 영화의 영화제 상영을 원천 봉쇄하려는 조치라는 것이다.

 물론 영진위는 아직 개정안이 확정 전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계의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모든 걸 떠나 영화아카데미를 비롯해 100여 개에 달하는 전국 영화학과의 졸업영화제, 그리고 1년에 수십 개 혹은 1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영화제나 기획전 상영작을 전부 사전에 스크리닝하는 게 과연 가능하고 유용한 일일까도 싶다. 사전 검열이니, 그에 맞서는 정치투쟁이니 시계를 되돌려 80년대식 문화풍경이 재연되는 것도 안타깝기만 하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