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박근혜의 변신은 무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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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논설위원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진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골프 해금(解禁)령도 제비 한 마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거기서 봄을 느끼고 싶다.

 사실 나는 박 대통령이 자기 입으로 골프 활성화를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골프에 대해 단호했다. 정권 초부터 경고했다. 국무회의에서 “안보가 위중한 때 현역 군인들이 골프를 쳤다. 특별히 주의해서 이런 일이 없게 해달라”고 했다. 싸늘했던 당시 회의 분위기까지 관가에 전해졌다. 한 번 아니면 아닌 대통령이니 이 정권 내내 골프 해금은 없다고 봤다.

 몇 달 뒤엔 이경재 당시 방송통신위원장이 “소비 진작에 도움이 된다”며 골프 해금을 건의했지만 대통령은 대꾸도 안 했다고 한다. 그 뒤 골프 매니어인 허태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휴가 때 자기 돈으로 하는 건 된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청와대 수석은 없었다. 과연 대통령은 얼마 뒤 “그런데 수석님들이 골프 칠 시간은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골프 해금 자체는 별것 아닐 수 있다. 공무원이 골프 좀 친다고 경기가 확 살아날 리도 없다. 하지만 경제는 심리다. 부자가 쉽게 지갑을 열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소비가 산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대통령의 예도 있다. DJ는 어떻게든 경기를 살려보겠다며 주변에 골프를 권했다. 그런 노력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알렸다.

 유가가 반에 반 토막이 났는데도 요즘 소비 심리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 물가는 두 달 연속 0%대 오르는 데 그쳤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아직은 괜찮다”고 하지만 시장엔 이미 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근원인플레이션율은 유럽·일본을 밑돈다. 경제가 크게 활력을 잃고 있다는 증표다. 골프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풀 수 있다면 풀어야 할 판이다. 그나마 골프는 대통령 말 한마디면 된다. 타이밍도 괜찮다. 2월 국회가 김영란법을 통과시키면 공직자의 ‘골프 갑질’ 걱정도 크게 줄 것이다.

 고집을 꺾는 모양새도 봐줄 만했다. 국무회의에서 농반진반 섞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그런 것(골프) 솔선수범하라면 기쁘세요?”라고 농을 건넸다. “언제 골프 금지령을 내리기는 했나요?”라며 체면치레도 했다. 계면쩍었을 것이다. 아닌 척 슬쩍 시치미 떼며 물러나는 모습, 변심의 매력으로 받아주자. 여자의 변심처럼 대통령의 변심도 무죄다.

 그렇다. 골프 해금처럼 하면 된다. 변심만이 길이다. 대통령 지지율 20%대, 집토끼마저 떠났다. 다들 박근혜 정부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믿고 싶지 않다. 박근혜가 누군가. 그는 절망에서 단련됐다. 시련 앞에서 변신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나간 집토끼부터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부터 완전히 정리해야 한다. 큰 폭의 개각도 좋지만 이게 더 급하다. 국민 이기는 장사는 없다. 대통령이 져야 한다. “수족을 자르면 누가 나를 믿고 일하나” 하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수족까지 잘라내야 국민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믿는다. 막상 잘라내면 그땐 국민이 되레 미안해 할 거다. “뭐 그렇게까지. 그럴 것까진 없는데….” 동정론도 일 거다. 그제야 비로소 다시 박근혜에게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의 목도 베었다. 국가주의자인 박근혜가 못할 게 뭔가. 그게 3인방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신들 때문에 주군이 절체절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싶은 가신이 어디 있겠나.

 필요할 때 쓰고 버린 인물들도 다시 모셔야 한다. 중도·통합·탕평은 말로 되는 게 아니다. 굳이 자리를 주지 않아도 좋다. 경제민주화의 김종인, 비판적 보수의 이상돈을 불러 밥이라도 한번 사는 거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지난 2년, 국민도 대통령도 서로의 민낯을 봤다. 속속들이 봤다. 대통령이 얼마나 불통인지 다 안다. 그러니 그만큼만 해도 국민은 안다. 대통령이 진짜 변심했는지 아닌지. 제비가 한 마리인지 열 마리인지. 그렇게 제비가 열 마리가 되면, 마침내 봄이 오는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