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좀 받은 기름값 … 원유전쟁 식어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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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알나이미

국제원유 가격이 배럴당 50달러 선을 훌쩍 뛰어 넘었다. 4일 온라인 거래에서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52달러 선에서, 영국 브렌트유 값은 57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국내 주유소 가격과 밀접한 중동 두바이산 원유 값도 53달러 선을 유지했다. 최근 한 달여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지난달 28일 이후 닷새(거래일 기준)만에 기름 값이 18% 정도 반등했다”며 “이처럼 짧은 기간에 원유 값이 급등한 일은 대세상승기인 2007년에도 보기 드물었다”고 보도했다.

 세 가지 요인이 화음을 이룬 탓으로 풀이됐다. 우선 미국 원유와 가스의 ‘채굴착공’ 건수가 확 줄었다. 미 에너지분석 회사인 베이커휴즈는 최근 “1월 마지막 주 채굴착공 건수는 1543건에 그쳤다”며 “전주보다 5.5%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2010년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였다.

 또 헤지펀드의 매수가 반등을 거들었다. 톰슨로이터는 “헤지펀드들이 공매도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실물 원유를 대거 사들였다”고 전했다. 공매도는 보유하지 않은 원유를 일단 판 뒤 가격이 떨어지면 되사 갚는 투자 기법이다. 시장가격이 공매도 계약 값보다 낮으면 낮을수록 수익이 커지는 게임이다. 최근 헤지펀드는 공매도를 대거 늘렸다. 이 밖에 미 정유회사 노동자의 파업 가능성도 원유 가격 회복을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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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요인 가운데 전문가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바로 미국의 채굴착공 건수다. 사우디아라비아 알리 알나이미 석유장관이 지난해 11월27일 원유전쟁을 시작한 이후 채굴착공 건수가 급감했다. 베이커휴즈가 “채굴 절벽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평할 정도다. 원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셰일에너지 회사들이 채굴을 포기해서다. 알나이미 장관의 노림수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원유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인가. 월스트리트저널은 “원유 시장 전문가들이나 투자자 모두 요즘의 가격 반등을 가격 하락의 끝이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전히 국제 원유시장이 공급 과잉 상태여서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 분석에 따르면 줄어든 채굴착공 건수가 공급 감소로 이어지기까지는 9개월 정도 걸린다. 지난해 11월27일 이후 채굴착공 건수가 본격적으로 줄기 시작했으니 올 8월쯤부터 미국산 원유 생산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미 CNBC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기름 값 반등은 하락 흐름이 상승 흐름으로 바뀌는 신호가 아니라 ‘데드 캣 바운스(Dead Cat Bounce)’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진단했다. 죽은 고양이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튀어 오르듯이, 급격히 떨어진 유가 또는 자산 가격도 임시로 소폭 반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직은 투자은행 등이 올해 예상 가격을 수정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상품시장 리더격인 미 투자은행 골드먼삭스는 올해 평균 유가(WTI)를 배럴당 47.15달러로 예측했다. 영국 금융그룹 바클레이스는 골드먼삭스보다 한 술 더 떠 42달러로 내다봤다.

 중소기업 수준인 셰일에너지회사들만이 채굴이나 유전 개발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세계 3대 석유회사인 BP가 올해 유전개발 등을 위한 투자 규모를 지난해보다 17% 정도 줄인 200억 달러로 정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저유가 시대가 1980년대 중반 이후처럼 4년 정도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오는 까닭이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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