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7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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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먼저 광주에 들러서 몇몇 사람을 만났는데 언젠가 조태일과 강연 내려갔다가 인사를 했던 한학하는 박석무며 시인 문병란 등과 술 한잔을 했다. 박석무는 양성우, 조태일 등과 같은 또래 친구였는데 나와도 대번에 만나자마자 말을 놓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가 김남주, 이강 등과 함께 '함성'지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래도 무안인가 어디에서 중학교 임시 교사로 아까운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박석무의 역사와 고전에 관한 박학다식과 장광설은 당대에 거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인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특징은 스스로의 명강의에 도취되어 순간순간마다 흥분을 금치 못하여 연상 상대방에게 침을 튀기는 점이었다. 나는 그의 젠 척하는 구라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제 말이 나왔으니 그야말로 '교육방송'의 원조라 할 만하다. 근년에 방송에 나와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관한 특강을 하는데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교육방송이라면 박석무를 으뜸으로 치는 이유가 그에게는 뜨거운 열정과 해학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가 권유한 곳이 강진과 해남이었다. 말씀인즉, 어디 가서 터를 잡고 임시로 얹혀 살더라도 연유와 맥락이 닿는 곳에서 지내면 얻는 것이 많다는 거였다. 남도 유배문화의 삼각 지점이 닿는 곳이 강진 해남 제주인 셈이었다.

나는 동행했던 여운과 먼저 강진에 들렀는데 마땅한 집이 보이질 않았다. 마침 강진만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 한 채가 있어 둘러보고는 마음에 들었지만, 워낙 집이 퇴락한 데 비해서 목돈이 너무 들 만큼 비싼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윤한봉이가 자기 형 집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해남으로 넘어갔는데 그곳에는 여운의 홀엄씨 모친께서 여고 교장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운의 동창생인 김동섭이가 낙향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이 알선해준 집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들먹하게 지은 고풍스러운 고가가 1000여 평 되는 잘 꾸민 전통 정원 한가운데 있고 그 마당 안쪽으로 따로 돌담을 둘러친 100평의 공간 안에 행랑채 비슷한 방 두 칸짜리 남부형 일자 민가가 있었다. 햇빛도 잘 들고 무엇보다 마당 안에 엄청나게 자라난 느티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우수수, 하는 바람소리가 좋았다. 집은 몇 년이나 내버려 두었다는데 빈집이었다. 김동섭이에게 사람을 구해서 손을 좀 보게 하라고 부탁하고는 그 집으로 정해 버렸다. 몇 년 전에 수십 년이나 지나서 해남에 찾아가 보았더니 당시의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정답던 읍내의 고샅길이며 토담 돌담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웬 꼴사나운 아파트 건물들이 시누대 우거졌던 뒷산 중턱을 점령하고 버티어 서 있었다. 내 살던 곳을 들여다보니 큰 집 정원은 사라지고 올망졸망한 집장사 집들이 들어섰는데 우리 마당 안에 섰던 동백나무는 그루터기도 남지 않았고 그 할머니 같던 품 넓은 느티나무도 베어 버린 그루터기만 탁자처럼 남았다.

한 달 뒤에 나는 가족들을 버스로 내려보내고 이삿짐 트럭을 타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부터는 비포장 도로였는데 거의 해 저물녘에야 우슬재를 넘어갔다. 석양에 비낀 읍내의 기와집 지붕들이며 저녁 짓는 연기가 오르는 풍경은 고향처럼 포근해 보였다. 나는 그때부터 10여 년을 호남에서 살게 되는데 그야말로 거친 불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세월이 되었다.

<1.2부 끝>

작가 황석영

"소설 3부 내년 10월부터 연재 … 독자 여러분께 감사"

자전소설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2부를 오늘로 끝맺습니다. 3부는 내년 10월에 시작합니다.

3부 연재를 일 년 뒤로 늦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년 상반기 영국의 케넌게이트 출판사가 기획한 세계신화시리즈 집필에 매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1개 국가의 대표 작가들이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바리공주 신화를 토대로 한 장편 소설을 구상 중입니다. 만주 국경 부근에 살던 한 북한 소녀가 흩어진 가족을 찾아 중국을 돌아다니다 홍콩에서 컨테이너선을 타고 영국으로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릴 예정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앞으로의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3부는 전라도에서 현장 문화운동과 광주항쟁을 거쳐 '광주항쟁 기록' 집필 이후 일 년 동안의 외유, 뒤이은 방북 과정과 망명생활, 귀국과 투옥 생활로 마무리할 구상인데, 남북관계 등 민감한 부분이 있어 조금은 시간 간격을 둬야 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연재를 잇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제 소설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내년 10월 중앙일보 지면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작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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