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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퍼레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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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은행나무, 8천5백원

1968년생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는 요즘 한국과 일본의 독서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일본 작가 중 하나다.

호세대학 경영학부를 졸업한 뒤 별다른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20대 초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요시다는 97년 데뷔작 '최후의 아들'이 문학계 신인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파편''돌풍''열대어' 등 후속작들이 잇따라 일본 최고 권위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결국 2002년 '파크라이프'로 127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인 '퍼레이드'로 대중성 높은 신인작가에게 주어지는 야마모토슈고로상도 받았다.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상을 차례로 거머쥐었다고 치켜올려지는 가운데 국내 출판사들이 발빠르게 그의 작품들을 번역.소개하고 있다.

세권의 소설집 등 그의 네권의 소설 중 '파크라이프'(열림원)가 최근 출간된 데 이어 이번에 '퍼레이드'가 나왔고 '열목어'(문학동네)가 번역이 끝나 곧 출간될 예정이다.

과연 소설의 흡인력은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파트나 단독주택에서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공동으로 생활하는 '룸셰어'라는 일본의 요즘 풍조를 다룬 소설에는 모두 다섯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21세의 남자 대학생 스기모토 요스케, 인기 탤런트와의 사랑에 목맨 대책없는 아가씨인 23세의 오쿠치 고토미, 오쿠치의 친구이자 술에 관한 한 웬만한 남자 술꾼보다 화끈하게 '고'를 외치는 24세의 소마 미라이, 공원을 배회하는 청소년 남창인 18살의 고쿠보 사토루, 다섯 식구의 좌장으로 일견 가장 건실해 보이고 나머지 넷의 상담역인 28세의 이하라 나오키 등.

세명의 남자와 두명의 여자가 차례로 화자가 돼 풀어내는, 특별할 것도 없는 '룸' 주변의 신변잡사들은 작가의 능청스러운 서술, 허를 찌르는 상황 설정 등에 힘입어 때로는 폭소를 자아내고, 때로는 미소짓게 한다.

가령 새벽에 갑자기 생각이 나 냉장고 냉동실의 성에를 제거하던 미라이와 목이 말라 잠이 깬 요스케가 나누는 짧은 대화 장면은 절로 웃음이 난다.

인기척 없이 다가온 요스케에게 미라이가 "무서웠다"고 타박하자, 요스케는 오히려 자신이 무서웠다고 항변한다. 새벽에 캄캄한 주방에서 냉동실 성에를 제거하는 여자. 겁날 만하다.

소설은 상당 부분 웃음 유발에 주력하고 있고, 다섯명은 하나같이 개인주의적이고 폭발적인 행동이나 힘의 지향과는 거리가 먼 무기력한 존재들인 까닭에, 공유되는 룸은 평화스러워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섯명 모두 문제적인 인간들이다.

시골에서 초밥집을 하는 아버지의 후원에 힘입어 도쿄로 유학 온 요스케는 선배의 애인과 하룻밤을 보낸 뒤 죄책감에 사로잡혀 아침 식탁 선배 애인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서럽게 눈물을 짠다.

가장 균열이 심한 주인공은 나오키다. 조깅을 즐기는 건실한 생활을 하는 나오키는 실은 룸 주변에서 빈발했던, 여자들만 골라 안면을 뭉개놓은 잔인한 폭행의 장본인으로 밝혀진다.

구성원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량해 보이는 외면과는 달리 폭력과 이기주의로 일그러진 내면 사이의 이율배반, 그 괴리를 이해하는 실마리는 미라이의 다음과 같은 사변에서 찾을 수 있다.

'룸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실제의 모습은 그 누구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룸'은 결국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된다.

후반부 유머가 줄어들며 다소 지루해지지만 소설의 메시지는 경청할 만한 것이다. 가정이나 조직이나, 국가라는 이름의 '룸'에서 우리는 혹 본모습을 숨긴 채 어떤 가장된 역할을 맡고 있지는 않은가.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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