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아주여기자 세미나에 다녀와서|이것저것 뒤범벅…"할로할로"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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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7일부터 1주일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여기자세미나 참석을 위해 그곳에 머물면서 느낀 인상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종잡을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오래 살고 있있던 교포 한분이 바로 그 종잡을 수 없음이 필리핀의 특징이며 이 필리핀의 특깅은 그들의 역사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등지에서 건너온 필리핀인들은 스페인·미국·일본등지의 지배를 받으며 현대에 이르렀다. 자연 이질적인 .문학가 뒤섞일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8월의 마닐라는 우기로 간간이 소나기가 쏟아지고 또 햇볕이 쨍쨍 비치기도하는 변덕스런 날씨다.
마닐라에서 처음 맞는 이른아침, 호텔근처에 있는 호세 라이갈 공원에 나가 보았다.
머리띠를 두른 젊은이들의 조깅대열, 여기에 40대이상은 되어보이는 남녀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태극권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태권도를 아주 느린 슬로비디오로 보는 듯한 이 운동이 하도 낯설어 혹시 중국인이냐고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태극권이 중국의 대중운동이긴 하나 필리핀 사람들도 이 운동을 많이 하고있다고 설명해준다.
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택시를 향해 달렸다. 순간 태극권을 하고 있던 50대주부 한사람이 팔을 잡으며 말린다.
외국여자 혼자서 택시타는건, 아주 위험하다는 그들의 충고. 얼마나 택시운전기사를 믿을수 없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음식점이나 가게·호텔마다 경비원이 권총을 차고 지키고 선 것을 보면 분위기가 짐작이 간다. 몇년전의 화재로 불에 탔다는 마닐라 오오꾸라호텔의 모습도 을씨년스럽다.
아침에 공원에서 태극권운동을 할수있는 마닐라중산층 주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닐라의 슬럼가에 가보면 알수 있다.
톤도지구를 비롯한 마닐라의 슬럼가에는 메트로 마닐라인구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약2백만명의 빈민이 살고있다.
불과 3∼4평도 안되는 움막같은 집에서 10명 내외의 식구가 살고있는 슬럼가의 한달 집세는 60페소(약4천5백원).
60%이상의 사람이 영양실조에 걸려있다는 슬럼가이긴 하지만 자녀수는 적어도 4∼5명이 넘는다. 물론 10명이 넘는 것도 예사로 안다. 인구 6천만명에 육박한 필리핀에서 가족계획계몽을 끊임없이 펴고 있으나 슬럼가에서는 자녀를 노동력으로 계산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를 볼 수 없다.
자녀들은 7세만되어도 사탕장수나 꽃장수, 담배장수, 그리고 빈병줍기 등으로 돈벌이를 시작하며 슬럼가의 가장 큰 문제가운데 하나인 식수공급도 자녀들이 맡고있다.
슬럼가에서 그 집의 가계를 가늠할수 있는 것은 물의 사용량이다. 5갤런에 15센타보(약l백3O원)에서 50센타보(약3백80원)하는 물을 매일 사서 써야하는 슬럼가에서는 2바께쓰 정도의물로 하루를 사는 가족도 많다.
대통령부인 「이멜다」여사가 메트로마닐라지사가 된 것은 75년말. 76년부터 그녀는 도시미화계획을 위해 거금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멜다」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계획은 일부, 외국손님을 위해 국제회의장이며 공연장·호텔·쇼핑센터등을 짓고 슬럼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밀어내도 해마다 늘어나는 건 슬럼가 인구뿐이라고 필리핀의 한 여기자가 설명해준다.
슬럼가 정리를 위해 지은 불리스(Bliss)로 불리는 모델공영주택은 10일간이 아닌 단10시간에 지어진 것이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불리스에 현재 입주하고있는 사람도 슬럼가 사람이 아닌 생활이 어느정도 안정된 사람들이다. 「이멜다」여사가 아니면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필리핀엔 빈부차가 너무 엄청나다.
자가용비행기로 여행할수 있는 10%미만의 부호와 슬럼가가 대조를 이룬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선진 어느나라 못지 않게 활발한편. 정부나 각계각층에 여성지도자가 많고 그래서 필리핀은 남성보다 여성이 우수한 나라란 말을 듣기도 한다.
한편 세계적인 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섹스관광이 이곳에서도 문젯거리가 되고 있음을 볼 때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의 대표적인 음식가운데 할로할로라는 것이 있다.
필리핀어로 『여러가지가 뒤섞인 모양』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빙수와 비슷한 것이다. 바나나·파파야·파인애플·팥·감자등 많은 종류의 재료를 잘게 썰어 잔아래 깔고 그 위에 얼음을 갈아 얹은후 또 밀크·시럽등을 듬뿍 끼얹어 맛의 범벅을 만든 음식이다. 맛있는건 뭐든지 한꺼번에 다 먹자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동네마다 있는 잡화점은 사리사리스토어로 불리는데 사리사리라는 말의 뜻 역시『여러가지』, 『무엇이나 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할로할로」나 「사리사리」에서 무언가 많은 것이 마구 뒤섞여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바로 이것이 오늘의 필리핀의 인상이기도하다.
대중교통수단인 지프니나트라이시클을 보아도 요란한 느낌을 받는다. 새·말등의 조각은 물론 예수와 성모마리아, 여성의 누드화, 조화, 비닐끈등이 모두 동원되어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을 빈틈없이 장식하고있다.
필리핀의 가능성은 무엇이겠느냐고 묻는 질문에 한 여기자가 풍부한 천연자원, 그리고 발랑가이(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본뜬 것으로 발랑가이는 작은 배를 의미하고 그 작은 배에 모두 함께 타고있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의 자원봉사자라고 대답했다.
『「아키노」는?』
부정적으로 고개를 흔들던 그녀는 한참 있다가 그도 필리핀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라고 대답했다. 「아키노」가 간 지금 할로할로의 뜻이 그냥 뒤범벅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것의 조화로 표현될수 있을 때 필리핀의 가능성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김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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