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도서정가제 시장 합리화냐 불황 요인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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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시행 석달째. 이미 제도는 시작됐으나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은 여전히 뜨겁게 맞서고 있다. 유통 시장의 혼란을 막아주고 튼실한 출판시장을 만들기 위해 시행된 이 제도는 왜 이리 많은 말을 낳고 있는 것일까.

우선 출판 불황에 악재로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요즘 출판계는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불황'을 겪고 있다고 한다. 업계 10위권 안에 드는 한 단행본 출판사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이상 매출이 떨어졌다"고 밝혔다.

'대박'으로 이어졌던 MBC 방송의 '!느낌표' 선정 도서도 판매 실적이 전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다. 최근 선정된 '!느낌표' 도서 가운데는 20만부가 겨우 나간 것도 있다. 이전 1백만부 가까이 팔리던 데 비하면 현저한 감소다.

최근에는 국내 최대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주인이 바뀌었다. 지난해 8월 와우북과 합병해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예스24'의 지난해 실적은 매출 9백98억원에 순손실이 93억원. 제살 깎아먹기 경영을 해왔다는 소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인터넷 서점은 출판사들의 좋은 판매처였다. 어음 거래가 다반사인 도매상.서점과 달리 현금으로 책값을 지불해주고 주문량도 갈수록 늘었기 때문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인터넷 서점이 오프라인 서점보다 할인도 많이 해주고 배달까지 해주니 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 서점의 지나친 할인과 경쟁은 오프라인 서점을 위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프라인 서점도 고사하고 인터넷 서점도 출혈 경쟁으로 쓰러질 것이라는 '위기론'이 대두했다. 이런 주장에 힘입어 올해 초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것이다.

이 도서정가제 때문에 출판사-인터넷 서점 사이의 밀월이 끝나고 말았다. 인터넷 서점의 할인 혜택이 없자 매출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물론 이라크 전쟁 등 악재 탓도 컸다. 도서정가제 실시 직전, 인터넷 서점은 할인율을 대폭 늘려 고객 끌어들이기에 나섰었다.

도서정가제가 되면 책값이 올라갈 것이라고 여긴 소비자들은 연말에 집중적으로 책을 샀고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지갑을 닫고 말았다. 매출이 떨어지게 되니 도서정가제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 출판사의 주간은 "도서정가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 도서 등 다양한 책들을 유통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며 "그러나 시행 이후 인문서.전문서의 마케팅이 더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도서정가제 이전에는 3만~4만원의 고가 도서들도 엄청난 할인혜택에 힘입어 기본 부수는 소화가 됐으나, 제값 다 받는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독자들이 좀처럼 책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서 등의 출고가가 소설류 등 일반 도서류(60~65%)보다 높은 65~70%라는 데도 원인이 있다. 도매상들이 마진 비율이 높은 일반 도서류 유통에 역점을 두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싸게 파는 베스트셀러보다 기획이 훌륭한 책이 각광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서정가제가 정착되면 국산영화 상영비율을 정해놓은 스크린쿼터제처럼 양질의 책들이 서점에 배치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이는 궁극적으로 출판시장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출판 시장 위축을 낳을지, 양서 보급의 교두보가 될지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시행 석달째 접어들면서, 벌써부터 드러나는 찬반 대립은 출판시장에 득될 것이 없다. 출판사와 유통업체들은 공생 관계라는 사실을 잊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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