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교수 파문을 보고…보수-진보의 자기 성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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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이상과 비전 제시에 둔감 '진보의 실패' 반사이익만 추구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생각할 때 하늘을 향해 나는 새의 은유가 제격이다. 새는 좌우로 날지만, 일정한 높이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자신에게 밀랍 날개를 붙여준 다이달로스로부터 "너무 높이 날지도, 너무 낮게 날지도 말라"는 충고를 받는다. 젊은 혈기의 이카로스는 이 충고를 무시한 채 높이 날다가 태양열에 날개가 녹아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왼쪽으로 날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은 이카로스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성업 중인 진보는 이상을 앞세우며 개혁을 추구해 왔지만, 그 이상이 현실과 맞지 않는 1970~80년대의 '늦깎이 이상'이라는 것이 흠이다.

오른쪽으로 날고 있는 보수의 문제는 무엇일까. 진보와 달리 너무 낮게 날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도 처음에는 이상이 있었고, 그 이상을 향해 높이 날았다. 어려운 가운데 나라를 세우고 또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진력했던 것은 이상과 비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난에 찌든 이 땅에서 "잘 살아 보자"는 보수의 비전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비전이 실현되자 새로운 이상을 설정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상 실현의 실적에 취한 나머지 현실에 안주해버린 것이다. 이상이 없다 보니 주도적으로 무엇을 내놓기보다 '진보의 실패'에 대해 반사적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다.

근대화를 이루고 빵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보수주의자의 공이긴 하지만,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비전이 필요한데, 현실을 중시한 결과 변화와 변신에 둔감해졌다. 북한의 사정에 정통한 현실주의자가 되다 보니 북한을 껴안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했다. 또 미국의 은혜와 힘을 너무나 잘 꿰뚫고 있는 현실주의자로서 미국에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보수가 현실에 매몰되기보다 이상을 향해 높이 날려면, 그 이상의 내용을 견실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우리는 왜 '사회주의적 이상'만 말하며 '보수주의자의 이상'은 말할 수 없을까. '부자 아빠'나 '2만 달러 시대 달성'이 보수의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속물적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같은 거시적 명제들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수는 대한민국의 정통적 가치를 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정통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말이 없었다. 때로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으로 그 내용을 삼아왔는데, 반공은 소극적 내용일지언정, 이상으로 담아야 할 적극적 내용은 아니다. 보수의 내용은 물론 하루아침에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 쪽의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같이 나누지 못하나" "왜 일류만 고집하나" 하는 문제 제기에 경청하면서 보수주의자들도 '나눔'과 '베풂'을 외쳐야 한다. 다만 국가의 강제력보다 사적 이니셔티브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보수가 이상적 비전으로 삼아야 할 우선적 내용이라면 자유주의적 가치일 것이다. 권리, 자율, 관용, 가족의 신성성, 강제의 최소화 등이 그들이 아닐까. 특히 다원주의와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가치를 위해 감옥도 가고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도 필요하다. 또 말의 힘은 평지를 달릴 때보다 언덕을 오를 때 알 수 있듯이, 그 이상에 진정성이 있음을 보여주려면 힘들 때 이를 위한 결단도 요청된다.

이루어야 할 이상이 없으면, 속물근성만 늘게 마련이다. '평등'을 내세우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매력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자유'도 매력적인 이상이 될 수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매력적인 비전으로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했을 뿐이다.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함으로써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제 한국의 보수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런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견에는 단호히 반대하지만, 그런 의견을 낼 수 있는 권리는 존중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도 자유주의 이상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보수 논객 박효종 교수는

경상대 교수를 거쳐 99년 이후 서울대에 재직하고 있다. '국가와 권위'(박영사), '한국의 보수를 논한다'(공저.바오출판사) 등을 펴냈다. 현재 '교과서 포럼' 상임대표며 뉴 라이트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일부 중.고교의 역사교과서가 반미.친북.반재벌 관점에 물들어 있다는 판단 아래 이 같은 자학(自虐)사관을 바로잡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낡은 좌파이론 안주하거나 유행 따른 첨단주의에 빠져

한국의 진보학계는 한국전쟁과 함께 사라졌다가 1980년 광주학살을 계기로 빠르게 복원돼 80, 90년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러한 한국의 진보학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소위 민주화가 18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학계는 아직도 한쪽 팔을 묶고 보수학자들과 대결해야 하는 일종의 핸디캡 게임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학자가 주류 시각과 다른 급진적 주장을 하고 나서면 당연히 그 주장을 학술적 논쟁을 통해 검증하고,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 그 주장과 그 학자는 자연스럽게 학술적으로 매장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강정구 교수 사태가 보여주듯이 이 같은 학술적 검증 과정에 앞서 국가보안법에 의한 구속 위협이 따르게 된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학자들은 순수하게 학술적인 주장을 할 때조차 혹시 글이 문제가 돼 잡혀가는 것은 아닌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부끄럽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진보학자들이 다른 나라의 진보학자들과 달리 누릴 수 있었던 특권 아닌 특권도 있다. 그동안 반공체제 아래에서 누려온 이념적 독점에 안주해 온 보수학계의 게으름 덕분에, 그리고 진보와 변혁을 바라는 대학가와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한국의 진보학계는 80년대 이후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학문적 성과나 깊이에 비해 과분한 평가를 받고 너무 쉽게 학문적 헤게모니와 도덕적 우월성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해외 좌파의 연구 성과를 기계적으로 한국에 적용시킨 낮은 수준의 연구 업적들이 대단한 것인 양 대접을 받았고, 학문적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석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조차 진보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글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처럼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 진보 학문의 학문적 영향력은 소련.동유럽의 몰락과 함께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거품이 빠지면서 급속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진리는 정세의 효과"라는 말이 있듯이 이 같은 진보학계를 위기에서 구한 것은 97년 경제위기라고 할 수 있다. 진보학계로서는 "그것 봐, 우리가 뭐라고 그랬어"라고 할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판 역사의 종말론에 빠져 한국 현대사 미화에 바빴던 보수학계는 더 한심하지만 97년 위기를 통해 진보학계 역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비판에 매몰돼 구체적인 위기의 도래를 예측하지 못한 무능력을 보여줬다.

한국의 진보학계는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일부는 낡은 기계적 좌파이론에 안주해 있다면, 일부는 이와는 정반대로 유행에 따라 새로운 주의로 변신하는 첨단주의에 빠져 있다. 세계화로부터 신자유주의, 북한 인권 문제 등 우리의 핵심 의제들에 대해 진보적 담론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재평가 등 보수학계의 반격에 대한 발본적 반비판, 그리고 진보학계 안의 치열한 내부논쟁은 사라지고 지적 독백에 안주해 있다. 뜨거웠던 사회 구성체 논쟁은 이제 지나간 무용담이 되고 말았다. '진보학자들'은 아직 존재할지 모르지만 하나의 학문 공동체로서의 진보학계는 강정구 사태와 같은 공안 탄압에 대한 항의성명 때 외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와 관련, 국가보안법과 반공체제는 진보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학문은 자기 성찰과 내부 비판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는데 국가보안법 체제는 주기적으로 강정구 사태 같은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진보학계가 이 같은 탄압에 대항해 싸우느라 자기 성찰과 내부 비판을 할 기회, 이를 통해 학문적으로 발전하는 기회를 박탈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강정구 교수의 글에 대해 공안당국과 보수 언론이 핏발선 눈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설사 그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다른 진보학자가 그를 학문적으로 비판하고 나설 수 있겠는가.

진보학계의 자기 성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내부적 성찰과 비판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보안법 체제를 해소해야 한다.

진보 논객 손호철 교수는

중앙고.서울대를 거쳐 미 텍사스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학문적 성취나 학계 안의 역할 모두에서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로 활동해 왔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정치'(푸른숲), '현대민주주의론'(창비) 등을 저술했다. 99년 이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신자유주의.북한 인권.세계화 등 우리 시대 핵심 의제에 대한 진보적 의제 설정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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