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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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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러시아는 두 얼굴의 국가다. 망원경으로 러시아를 보면 이 국가는 전형적인 초강대국이다. 핵무기,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엄청난 석유자원, 높은 경제 성장률, 그리고 옛소련에 비해 25%가량 줄어들었지만 광대한 러시아 영토를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러시아를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러시아는 전형적인 제3세계 국가다. 경제 성장률이 높지만 이는 전적으로 고유가에 의존한 것이다. 러시아의 군사력도 과거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 인구(1억4000만 명)는 파키스탄(1억6000만 명)보다도 적으며 매년 50만 명씩 줄어들고 있다. 또 질병, 과도한 알코올 섭취, 어설픈 보건체계로 인해 러시아 남자들의 수명은 60세에도 못 미친다.

종합하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러시아가 허장성세로 꾸며진 허깨비 국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강대국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가 국제무대에서 수행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은 제한적이다. 예컨대 러시아는 이란과 북한의 핵문제,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문제는 러시아가 국제무대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 대답은 러시아의 정치적 안정, 경제 발전, 그리고 안보 전략 세 가지 요인에 달려 있다.

첫째, 러시아 정치가 안정을 이룩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가 러시아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또 분권화를 통해 과도한 권력 집중을 분산하고 법치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난 몇 년간 180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권력이 분산되기는커녕 더욱 중앙에 집중됐다.

둘째, 경제 전망도 흐릿하다. 고유가는 러시아 경제에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고유가로 러시아 경제는 흥청대지만 이 와중에 부정부패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또 제조업 같은 의미 있는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있다. 모스크바 지도자들은 고유가로 마련된 재원을 활용해 국민을 교육하고 도로.항만.통신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야 한다.

셋째, 러시아는 새로운 외교안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처럼 체첸반군에게 아무런 당근도 제시하지 않은 채 몽둥이만 휘두르는 구태의연한 외교 전략으로는 체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4년 12월 발생한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에서 보여준 강압적인 외교 방식도 재고해야 한다.

국제사회도 팔을 걷어붙이고 러시아를 지원해야 한다.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득이 안 된다. 러시아를 세계무역기구(WTO)를 비롯한 국제기구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러시아가 유럽연합(EU)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계사에는 쇠퇴기에 접어든 국가가 갑자기 분쟁을 일으켜 국제질서를 어지럽힌 사례가 종종 있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튀르크가 그랬고 또 20세기 말에는 유고슬라비아가 그랬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아직까지 자신을 그런대로 추슬러 왔다. 러시아는 아직 전면적인 내전을 겪지 않았고 인접국과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부적으로 국가적 통합을 이룬 상태는 아니다. 앞으로 러시아는 세계화 시대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러시아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21세기 성격과 국제질서가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 회장
정리=최원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