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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영 기자의 오후 여섯 詩] 박연준의 『소란』 중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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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일러스트 송혜영 기자]

물론 생각이 날 때가 있지.
아주 가끔.
'걸어도 걸어도'란 일본 영화를 보고 난 직후라든가,
피곤한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힘없이 단추를 풀 때.
혹은 치약을 짜다가 별안간.
청국장을 끓이다가 문득.
마치 먼 옛날 애인처럼 떠오르지.
내게 그런 애인이 정말 있었나, 싶은.
여기까지 쓰다가, 여러 번 멈췄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갑자기 당신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드니 힘드네.

있잖아, 장롱에 아슬아슬 쌓아놓은 이불들이 기어코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아빠가 쏟아지네.
감당이 안 되는데
아프진 않아.
이불은 그렇잖아.
무거워도 질식하게 두진 않고, 따뜻하고, 숨겨주잖아.
아빠가 살아 있을 때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픈 적 많았는데,
지금은 안 그래. 그냥 아련하고 따뜻해.
다행이지?
충분히 사랑했잖아요,
우리.

< 박연준의 『소란』 중에서 >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 박연주의 『소란』이라는 산문집에 있는 내용입니다. 오래 전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것들을 끄집어내, 이윽고 읽는 이의 마음을 다시금 소란하게 만드는 아련한 책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몇 주 전 환갑을 맞은 아버지 생신을 소홀하게 보낸 제가 떠올랐습니다. 주말까지 시간에 쫒기며 일 한다는 핑계로 피곤한 얼굴만 보여드렸죠. 아버지는 아들 딸 잘되라고 몇 십 년을 몸 바쳐 일하시고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타지에서 고생이십니다. 공기업 사옥들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내려가셨습니다. 아내 없이 혼자 지내자니 많이 불편하시답니다. 제 전화 한 통을 얼마나 반가워하시는 지 알면서도 피곤함이 먼저 앞서네요. 한가할 때는 별 생각이 없다가 바쁠 때면 왜 효도하고 싶은걸까요. 불효녀는 오늘도 일 합니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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