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2)육사졸업생들|백마부대증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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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미간의 줄다리기 협상이 계속되던 한국군 졔4차 파병 (전투부대분파) 조정은 「험프리」 미부통령의 두차례 서울방문으로 급진전을 봤다.
66년2월25일 이동원외무장관과 「브라운」미대사는 협상을 종결짓고 이른바 「한미합의의사록」을 작성했다. 이를 토대로 정부는 2월28일 청와대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맹호부대 보충을 위한 1개연대와 증강된 1개 전투사단및 이에 필요한 지원부대를 월남에 증파하기로 의결하고 이날자로 국회에 동의를 요청했었다.
한편 「브라운」대사는 3월7일 외무부를 방문, 『미국정부는 한국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월남에 전투부대를 증파하기로 절정한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하고 소위 「브라운각서」라는 형식으로 14개항목에 걸쳐 파병에 따른 「보장」을 했던 것이다.
주요내용을 보면 △월남증파병력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하고 추가 원대경비를 부담한다△한국의 대간첩작전 능력을 개선하기 위해 한미공동조사를 마치는대로 양국정부가 결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충족시키는데 기여한다 △한국의 탄약증산을 위해 병기창을 확장하는데 필요한 시설을 제공한다△월남에서의 전사 또는 전상보상금은 최근 한미합동군사위원회에서 합의된 지급율의 2배로 인상한다△한국군이 월남에 주둔하는 동안 군원이관을 중지한다△수출진흥을 위해 한국에 대한 기술원조를 증대한다는것 등이었다.
정부의 증파에 관한 동의안은 3월2일 국회본회의에 정식으로 보고, 발의됐으며 3월3일부터 예비심사가 시작되었다.
4차 파병안에 대한 국회의 반대론은 거세었다.
1차파병때 찬성을 했면 야당의 서범석·나용균·정운근의원마저 증파에는 반대를 하고 나섰으며 여당인공화당내에서도 차지철·서인석의원등이 개인적으로 증파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서인석의원은 『작년에 비둘기부대를 보낼때 정부는 전투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없다고 했다. 그 다음 1차증파때는 더 이상 파병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2차증파동의를 또 요청하고 있으니 3차증파가 없다고 어떻게 단언하겠는가?』고 물었다.
비둘기부대 파병때부터 남달리 강경했던 공화당의 차지철의원은 월남전은 일종의 생활화된 전쟁이므로 이같은 싸움에 우리가 더이상 개입할 의의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차지철의원은 이미 65년12윌 본인도 모르게 국방위소속에서 문공위로 상임위원회 배정이 바뀌어 정가에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장본인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국회에서 너무 지나치게 국군파월문제를 물고 늘어진 것이 원인이라고도 했지만 군대선배들에 대해 무례가 지나쳐 불의를 빚었던 것같다는 말도 있있다. 그때만해도 현역장성들의 발언권이 박대통령에게 비교적 잘 통했던 만큼 차의원에대해 여러사람이 기회있을 때마다 불평을 털어놓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뭏은 4차파병 동의안은 국회에서 장장 12일간의 심의끝에 3월20일 대부분의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찬95·반27·기권3으로 통과되었다.
국방부는 맹호에 이어 당시 전투서열 2위였던 백마부대를 증파부대로 꼽았다.
백마부대가 용문산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있을무렵 내한한 「웨스트모얼랜드」주월미군사령관은 백마의 훈련을 지켜보고 『미군은 지원자만 유격훈련을 받는데 전사단장병이 훈련받는것은 처음 본다』면서 『마음든든하다』고 격찬했었다.
백마사단장 이소동장군(육사2기·대장예편)은 백마의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키기위해 부대 창설이래 갖고 있던 은제트로피, 상패등 수백개를 용광로에 집어넣어 2O관 크기의 「백마상」을 종조하기도 했다. 백마부대와 함께 월남에 간 이 마스코트는 흰말이 갈기를 세운채 오른쪽 앞발을 치켜드는 힘찬 모습이었다.
백마의 선발대는 66년8월9일 월남으로 떠났으며 맹호의 보충연대인 혜산진부대는 이보다 앞서 4월말에 월남에 상륙, 66년9월현재 주월국군은 4만5천명에 달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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