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1)제79화 육군사관생들(24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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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66년1월1일하오8시25분.「험프리L 미국부통령이 미공군특별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아무리 우호관계가 깊은 국가간에도 정초에는 특사나 고위관리를 남의 나라에 파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미국은 이를 깨뜨리고 「험프리」 부통령을 새해 첫날 손님으로 서울에 보냈던 것이다.
「험프리L부통령은 2일상오 청화대를 방문,박정희대통령과 오찬을 나누면서 사실상 한 미정상회담을 가졌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험프리」 부통령은 정식으로 한국군 전투부대의 증파를 요청했던 것이다.
박-험프리회담」이 끝난후 신범직청와대대변인은 『월남전의 전망과 휴전 및 협상가능성을 비롯하여 양국 공동관심사를 광범위하게 논의했다』고 만 말 했으며「험프리L부통령은『한국의 고무적인 발전상과 한국군의 월남파병 및 한일협정 타결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영뜸한 이한성명을 남긴채 24시간만에 서울을 떠났던 것이다.
주룡과 맹호부대의 파병때만 해도 우리는 6·24 당시 우리를 도와준 미국에 대해 도움을 준다는 뜻에서 선뜻 파병결정을 내렸지만 또 다시 우리 국군을 월남에 파병한다는 것은 우선 우리의 안보와 방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군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전투부대의 증파문제는 미·월양국에서 제의해 왔지만 65년말 채명신주월군사령관도 1개전투연대법력의 증강을 건의해 왔었다.
당시의 주월국군 병력으로는 퀴논에서 빈케이까지 이르는 19번 도로(길이 70㎞, 폭40㎞)주변의 습지대와 정글을 책임지기에는 작전지역이 너무 넓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주월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려면 최소한1개 군단병력이 필요하다는 평가는 우리태삼에서도 오래전부터 내려놓고 있었지만 1백55마일 휴전선 방위때문에 선뜻' 증파문제를 우리가 먼저 끄집어 낼 수 없던 실정이었다.「험프리L부통령이 귀국한 후 이동원 외무장관과「브라운」주한 미국대사는 전투부대 증파에 따른 선항조건을 놓고 줄다리기식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이렇다 할 결론은 나질 않았다.
그래서 「험프리」 부통령은 2월 23일 다시 서울에 왔었다.
당시 우리정부의 입장은 ▲국군 3개 예비사단의 현대화와 공군력의 강화를 비롯한 국군장비 현대화▲휴전선에서 북괴가 도발할 경우 미국이 즉각적인 반격을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보장▲파월국군의 처우개선과 대사상자 보상▲바이 아메리컨(BA)정책의 완화와 바이 코리언(BK)정책의 지원▲1억5천만달러의 AID차관의 조기사용등이었다. 사실 이들 문제는 이동원외무장관이 65년3월 미국에 갔을 때 「존슨」대통령과 이미 합의에 도달했던 것이었지만어쩐 일인지 미국은 그 동안 구체적인 사항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을 미뤄왔던 것이다.
이동원외무장관과 「브라운」 대사간에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김성은국방장관과 나는 「비치」 주한유엔 군사령관을 상대로 파월장병의 전상·전사보상금문제등을 놓고 별도의 협상을 벌였다. 66년2월 어느날「비치」대장이 김성은장관공관을 찾아왔었다. 「비치」대장은 본국정부와 합의를 본 전사상자보상금 액수를 제시, 사병은 5백달러, 장교는 1천달러선이라고 말했다.
김성은장관은 한마디로 『노』 라고 대답하고 2배로 증액할 것을 요구했다.
김장관은 『제너럴 「비치」,우리 주장이 이렇게 관철되지 않으면 일을 못합니다. 맹호·주룡파월때 나는 국회에서 이번이 마지막 파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이번에 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미국이 그렇게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박대통령이 파병을 지시하더라도 국방장관인 나는 반대하겠읍니다님
김장관의 단호한「파병반대」선언에 김장관옆에 앉았던 나도 깜짝 놀랐었다.
「비치」대장도 얼굴에 약간 경련을 일으키는것 같았다.
그는 3일후 다시 장관공관을 찾아왔다.
전사상자 보상을 한국의 주장대로 받아들이 겠다는 것이었다. 그는『3일동안 잠을 설치며 본국정부와 씨름했었다』며 오랜만에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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