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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노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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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충남서천에서 3km남짓, 황해의 바닷바람에 출렁이는 초록빛 들판을 가로질러 한산쪽으로 달리노라면 금계산기슭 아늑한 분지에1백10여호 노씨문중이 처마를 맞대고 모였다
3백여년동안 양반의 가풍을 고집하고 전통을 이어온 유서깊은 마을 기산면두북리
입향조는 노세영 그는 고려말 랑장벼슬을 지내다 조선개국후 인근 한산지방에 은거한 노윤보의 7세손이다. 선조가 한산에 정착한 후 그의 후손들이 한산일대에 묘자리를 잡은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명당에 터를 잡은 조상탓일까, 서천군은 전국에서 노씨의 입김이 가장 드세다 군내 8백여호 5천여명이 노윤보의 후손 기름진 두북평야의 70%가 노씨집안 소유다. 두북리의 경우 조선말엽까지만해도 타성방이는 단1가구도 없었단다
1908년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일본인들이 비옥한 두북평야에 눈독을 들이고 서천일대에 몰려들었다 두북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북리에 터를 잡았던 일본인은 3년도 못넘기고 이마을을 등져야 했다 『두북리거주 일본인이 아들을 낳았다하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름모를 병으로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
후손 노양래씨(69)가 들려주는 거짓말같은 사실이다 『조상어른의 혼백이 일본인들을 좇아내고야 말았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노씨들은 큰 벼슬을 못했지만 조상섬기는 일은 으뜸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타성받이들이 혀를 내두를정도
두북리 노씨들은 아직도 양반의 가풍과 체통을 고집한다. 5∼6년전까지만 해도 꽃상여를 멘적이 없단다. 역사적으로 상여는 상놈등 천민이 다루어왔기 때문.
우리나라 모든 노씨의 도시조는 중국당나라 사림학사 노수. 당나라 말엽 877년(신라 헌강왕3년)전란을 피해 9명의 아들과 함께 신라로망명 평북 정주군릉리에 정착했다한다. 그후 아들 9형제가 고려조에 벼슬, 해는 광주백, 조는 교하백, 지는 풍천백, 구는 장연백, 만은 안동백, 갑은 안강백, 증은 연일백, 판은 평양백, 원은 곡산백에 봉해지니 후손들이 봉받은 고을이름을 각각 관향으로 삼았다. 이들 9형제가 곧「구관노씨」의 시조다.
전남 광주시 오치동 삼각산기슭 솔숲사이에 자리한 「삼릉단」 은 도시조인 노혜와 그의 아들 9형제의 단을모신 노씨문중의성역. 1926년후손 노종용씨가 주축이되어 문중에서 단을 세웠다.
노씨는 고려∼조선조에 꾸준히 번영을 누려왔다.

<평북 정주에 정착>
고려 성종조의 좌정승 노혁, 문종∼선종대의 학자 노단(상서좌복사) 의종조 문하시중평장사 노수순, 충정왕조 좌정승 노정, 충정왕조 문하시중평장사 노경수, 명종조 대랑평장사 노극청등이 고려조의 노씨 인물들. 이들중 노정은 공민왕때 그의 딸이 원나라의 태자비가 되면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세도를 떨치기도 했다. 그의 아들 노진은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비 순비의 아버지로 판밀직사를 지냈다.
노숭은 조선개국공신. 그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 지신사가 되고 우왕때 왕이 놀기를 좋아하는것을 보고 극간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성계의 쿠데타에 참여 l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태종때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노씨는 조선조에 총 91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상궁3명 대제학1명. 청백사2명.
노영국(태조종·병조참판) 노간(세종조·우의정), 노사진(성종조·영의정) ,노숙동(세종조 ·대사헌·청백리), 노공필(세조∼중종조·영중구부사)등은 조선초기의 얼굴들.

<삼장원 노사진>
l408년 (태종8년)한성부윤을 지냈던 노간은 당시 태종외 장인이었던 민제, (좌의정) 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 즉 태종비 원경왕후가 그의 처형이 된다. 그는 한때 처남인 민무구의 옥사에 관련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뒤에 무죄로 밝혀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손자가 세종∼성종대의 명신이요, 석학으로 명성을 날렸던 노사진이다. 성종 25년 영의정을 지냈던 그는 훈구파(단종을 보필하다 세조집권 후에도 계속정권에 참여한 신하들)의 단신으로 신진사림파와는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4년 무오사화때 사림들이 된서리를 맞게되자 오히려 그들을 비호하여 명망이 높았다. 그는 학자로도 명성을 날려 『경국대전』『연지승현』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의 아들 노공필도 성종때 육조의 판서를 두루거친 명신이었다. 그는 연산군4년 갑자사화때 귀양갔다가 중종반정후 복직, 영중구부사에 올랐다.
노수진은 중종∼선종대의 성리학자요 명신. 중종때 초시·회시·전시등에 「삼장원」하고 호당에 뽑혔던 수재였다. 명종때 이조좌랑에 재직중 을사사화 (l545년)에 걸려 파직, 19년동안 남해 진도등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정치적 파란을 겪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당대의 석학 이광 김린후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던것으로 유명하다.
선조가 즉위하자 재등용되어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미서 국민군단 창설>
선조에 이·병조판서등을 지낸 노진은 당대의 대문장가. 선조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증조부 노수동과함께 청백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이밖의 조선조의 인물로는 노직(선조 예판)과 노직 (동 병판)형제. 노자형(대사성), 노구산(한성부윤)등이 있다.
노씨문중은 일제암흑기에 항일투사 노백린장군을 냈다. l899년 일본육사졸업, 육군무관학교장, 육군연성학교장등을 역임. 1914년 미국으로 망명, 캘리포니아주에 항공학교 설립, 박용만과 함께 국민군단 창설. 3·1운동후인 1919년 상해임시정부군무총강등을 역임하면서 김좌진 이범석장군등과 함께 무력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대한의 남아여 혈전의 시 광복의 추가 래하였도다.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갈지다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철과 혈로서 조국을 살릴때가 이때가 아닌가 1920년 노백린장군이 광복군을 모집하면서 냈던「포고문1호」의 서두다.

<각계에 인재 많아>
노씨문중은 해방후 현재에도 사회각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초대심계원장 노진설(작고), 전대법원 행정처장 노용호(작고) 전국방장관 노재현(작고), 올림픽조직위원장 노태우(전내무부장관), 국가안전기획부장 노신영(전외무부장관) 8·9·10대 국회위원 노승환(전국노씨화수회장), 전국회의원 노인환(한미친선부회장), 국회의원 노태극(무소속·밀양-창녕)씨등이 정계·관계의 얼굴들
학계에는 노융희(법박·전서울대교수), 노재봉(정박·서울대교수0, 노정현(전연세대행정대학원장), 노영무(전성균관대법정대학장·변호사)씨등이 돋보인다.
대구고법부장판사 노승두씨, 군산지원장 노경래씨등은 법조계의 인물. 전서울신문편집국장 노석찬씨등은 언론계에서 활약해왔다.
해방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영수였던 노기남대주교, 「목이길어서 슬픈사슴이여」를 노래했던 추억속의 여류시인 노천명씨(작고) ,동양화가 노수현씨등은 종교 문화예술계에서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79년 창설된 전국 노씨화수회(회장 노승환 전국회의원)는 30만 노씨의 결속을 다지는 중앙기구. 화수회는 ▲월간노씨종보(편집국장노동환)발간▲문중출신변호사들이 중심이된 법률구조사업▲장학사업등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있다.
▲다음주는 「진성이씨」
글 김창욱기자 사진 채흥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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