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강수진 예술감독의 등 근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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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강수진 예술감독의 인터뷰.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냐는 국립발레단 홍보팀장의 전화를 미리 받았다.
이를테면 예술감독으로서의 포부를 밝히는 자리인 만큼, 정장 차림으로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발레단의 ‘나비부인’에서 발레리나로 무대에 오르니 발레리나 의상을 준비할 지를 묻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문엔 단 한 장의 사진이 게재되니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강 감독을 만나기 두어 달 전 등을 몰래 훔쳐 본 적 있다.
젊은 발레리노 사진 촬영을 위해 들른 연습실, 발레단원 앞에서 춤 동작을 시연하는 강 감독의 등 근육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먼발치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등 근육이 확연히 보였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 나이 쉰을 목전에 둔 발레리나, 게다가 예술감독을 겸하며 유지한 등 근육.
그 등 근육이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이야기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날 이미 작정해 두었다. 언젠가 강 감독을 만나면 반드시 등을 찍겠노라고….

등 근육이 제대로 보이는 옷을 준비하라고 했다.
걱정스레 “그래도 되겠냐?”는 되물음에 단호하게 그리하라고 해버렸다.
촬영 당일, 강 감독이 여러 의상을 보여주며 고르라 했다.
선택 기준은 당연히 등이 제대로 보이는 의상이었다.

강 감독의 주문은 딱 부러졌다.
“이것저것 요구하지 말고 딱 한가지로만 승부 하시죠.”
실제로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음을 미리 전해들은 터다.
더구나 ‘하루가 24시간밖에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을 정도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단원들 춤 지도와 발레단 행정 업무, 개인 연습 시간은 매일 오전 5시부터 출근 전까지,
그리고 오후 6시부터 밤 10∼11시까지라 했다.
정확히 정해진 인터뷰와 촬영시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단 한가지로 최선을 다하지는 의미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의 촬영, 포즈를 취하자마자 등 근육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격렬한 움직임이 없이도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어지간히 단련해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30년 부단한 연습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 등 근육이 그녀 스스로의 역사일 뿐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인 게다.

욕심을 다 채우고 나니 또 다른 욕심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발도 한번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이미 강 감독의 발은 험악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진기자로서 당연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발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지 않은가.

“등만 찍기로 약속했잖아요. 남편과 약속했어요. 발은 남편 외에 아무도 안 보여 주기로….”
그 단호함에 더 이상 채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미 약속한 시간은 다 되어버렸다.
최선을 다해 등 근육을 보여준 터이니 아쉬워도 순순히 물러나야 했다.

다음 기회에,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연히 발이 잘 보이는 의상을 준비하라 할 것이다.
발이 증언하는 역사를 기록해야 하기에….
다음엔 그녀의 발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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