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786>제79화 육사졸업생들(239)파월준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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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둘기부대 파병때도 그랬지만 3차 전투부대 파병때도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통과되기 전에 우리는 파병준비를 거의 끝내놓고 있었다.
국방부와 합참은 65년6월26일과 28일 두차례에 걸쳐 비밀회의를 열고 전투부대 편성지침을 작성, 완료했었다.
이때는 전투부대 파월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기 전이었다.
국방부령 제8호로 하달된 편성지침은①전투부대 병력은 60만병력 실링내에서 한다②부대규모는 1개 증강사단으로 육군 1개사단 (처음엔 마이너스 1개연대로 했으나 나중에 26연대가 증파됐다) 과 해병 1개연대및 동지원부대로 하고 총병력은 1만8천5백명을 기준으로 한다③장비는한국군 평균수준을 유지하되 사용효과가 적은 장비는 사용효과가 큰 장비로 대체한다는 것등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월남에 파견된 조사연락단이 육군과 해병대가 퀴논(육군)과 캄란에서 각각 분리되어 작전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보고를 해옴에 따라 파월해병부대는 여단편성이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여단규모로 병력수와 참모진을 구성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편성지침에 따라 각 해당부대는 7월6일까지 편성안을 작성, 합참에 제출하도록 했었다.
7월26일 야전군은 27사단을 파윌부대로 선정, 보고해왔으나 육본에서는 당시 전력평가에서 전투서열 1위였던수도사단 (맹호부대) 의 제1연대와 기갑연대, 제60포병대대, 61포병대대, 628포병대대및 군수사령부를 파월키로 결정했다.
사단장에는 당시 육본작전참모부장으로 전투부대 파월계획을 담당했던 채명신소장 (육사5기·중장예편·전주월한국군사령관) 을 임명했다.
파월부대장후보는 채장군이외에도 6명이 거론됐으나 정글전에 대한 일가견을 갖고 있었던 채장군이 적임자로 뽑힌 것이다.
채장군과 참모진은 8월17일 수도사단에 도착, 부대를 인수하고 기존부대를 모체로 새로운 파월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파월 맹호부대의 편성은 ①중령이상은 전투유경험자중에서 선발하고 (2)소대장은 가급적 육사출신 ③사병은군사특기자 ④공용화기는 1등사수, 개인화기는 특등사수이상인자로 정했다.
따라서 부대원은 군에서 엘리트로 꼽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소대장을 육사출신으로 선발하기로 한 것은 젊은육사출신 장교들이 실전경험을 쌓지못한것을 보완하기위한 것이었다.
이렇게해서 새로 편성된 맹호부대는 총병력이 1만3천6백72명이었다.
한편 해병대는 8월30일자로 해병대사령부 관리국장이었던 이봉출준장(중장예편·전해병대부사령관)을 파월해병전투단장에 임명하고 참모장에는 처음 파월해병연대장으로 선발되었던 정태석대령 (해사3기·중장예편·전해군제2차창) 을 임명했다.
해병대는 우선 파월부대 장병들을 전원 지원제로 선발하기로 하는 한편 (1)중령이상 장교는 전투유경험자중에서 선발하며 ②소령·중령은 고등군사반과정이수자 (3)대위는 초등군사반이수자 ④가급적이면 중국어·불어 해독자를 우선하고 (5)파월기간중에 정년에 해당되지 않는자를 대상으로 했다.
또 사병은 ①사상이 건전하고 신원이 확실한자 ②2대이상 독자가 아닌자 ③출발일을 기준하여 3개월이내에 전역대상이 아닌자 등으로 선발기준을 정했다.
이에따라 해병 제2여단을 모체로 3개보병대대와 1개포병대대, 그리고 특과지원중대등으로 편성된 총인원은 4천3백10명이었다.
선발된 주요지휘관은 보병1대대장에 명익표중령 (해병간부7기·대령예편·사업) , 2대대장에 오윤진중령(해병간부7기·소장예편·정치학박사) , 3대대장에 전정남중령 (해병간부5기·대령예편) , 포병대대장에 정영진중령(해병간부6기·중령예편) 등이었다.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의 편성이 완료되자 육군본부는 9월1일 주월군수지원사령부를 창설, 초대사령관에 이범준준장(육사8기·예편·현 국회의원) 을 임명하고 공병·통신·병기·병참·수송·화학·의무·행정등 12개 특과부대를 편성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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