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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외 이승만대통령<34>|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워커」장군은 우리에게 경무대가 아직도 위험하니 잠만은 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 자도록 하라고 제의해 왔다.
대통령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쪽이 더 안전할 것 같아 대통령에게 경호원들을 좀더 편히 쉬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하루 이틀만 「한국의 집」을 숙소로 하자고 간청했더니 대통령도 승낙했다.
대통령 애견 돌아와
그런데 그때 중앙청 서편에서 불길이 타올라오는 것을 대통령이 발견했다. 불구경을 하고 서있는 직원들을 보면서 대통령은 어서가서 불을 끄라고 큰소리로 명했다.
우리는 필동 「한국의 집」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다시 경무대로 돌아왔다. 멀리서는 아직도 포성이 들려오곤 했지만 참으로 청명한 가을날씨는 맑은 햇볕과 공기로 전쟁에 시달린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런데「해피」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굶어 죽었거나 행방불명이 된줄로 알았던 대통령의 애견 「해피」가 말이다. 그러자 열어젖힌 현관으로부터 「해피」가 달려왔다. 곧바로 그는 쏜살같이 대통령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분명히 「해피」였다. 비쩍마르고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해피」였다. 워낙 갑작스럽던 피난길에 그를 돌보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약은 것이 그 험난했던 나날을 어디에 숨어서 무엇을 먹고 지냈을까. 이제 돌아온 주인 옆을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토록 정답게 반기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 진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이날 대통령은 서울시의 민정을 알아보려고 나섰다. 우리는 대평로를 지나 남대문 쪽으로 차를 몰았다.
거리에는 시민들이 어지러진 길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남대문 근처에 이르자 대통령을 본 시민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대통령은 차를 멈추게 한 후 거리에 나섰다. 삽시간에 시민들이 모여들고 대통령과 그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흐느끼기도 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대통령은 갑자기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고싶어 어딘가 올라설 곳을 찾았고 마침내 그는 자동차 범퍼를 발판으로 딛고 앞에선 경호경관의 등에 몸을 의지하며 말을 시작했다.
서울 곳곳에 게릴라
『앞으로 아무리 뼈아픈 고통과 슬픔이 닥쳐오더라도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 참고 견디면 밝은 날이 올 것입니다』하고.
그동안 공산치하에서 고생한 시민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때 나는 이선영경사가 갑자기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고 황비서관이 『수류탄!』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대통령이 위급하다는 생각이 머리에 번쩍 떠올랐다. 나는 대통령을 끌어내려 얼른 자동차에 밀어넣었다. 또 하나의 위험이 스치고 간 것이다. 아직 서울에는 게릴라가 있다. 이경사에 의하면 수류탄이 굴러들어 왔는데 마침 그것이 불발탄이어서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녁에 정일권 장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오늘 상오 6시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국군3사단의 김종순 연대장이 지휘하는 부대의 우리 아이들이 38선 북쪽에 있는 기사문고지를 점령했으며 그들의 사기는 충천해 있다고 전했다. 대통령은 이 보고에 크게 만족해했으며 치하했다(주=10월1일 「국군의 날」은 이 때문에 제정됐다).
10월2일.
「워런·오스틴」유엔미국대표는 9월30일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서 38선이라는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도록 유엔에 요청했다.
그는 『침략군이 38선이라는 하나의 가공적인 선의 배후에 도피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국 및 세계평화에 대하여 재차 위협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을 남북으로 갈라놓는 인위적인 장벽은 법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존재의 근거가 없다.
이 인위적인 장벽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또는 조종하느냐는 지금 유엔이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6월27일에 안보이사회에서 결의한 지령은 국제평화와 안전보장이 한국에서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연합군의 군사행동을 허용한다는 폭넓은 것이었다』고 미국의 현실적인 입장을 재차 밝혔다.
「맥아더」장군은 10월1일 정오 북괴군총사령관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북괴군에 항복 권고
북괴군들의 전투력이 불원간에 전면적으로 궤멸되리라는 것을 경고하면서 유엔결의가 최소한의 인명손실과 파괴를 희망하고 있으므로 무기를 버리고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과 유엔군포로 전부 및 비전투원 억류자를 즉시 석방하여 보호가료해서 자기가 지시하는 장소에 수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불필요한 유혈과 재산파괴를 막도록 할 것을 기대한다고 성명을 냈다.
9월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의 적의 손해는 사상자 및 포로까지 합하여 약2만명에 달한다고 신성모 국방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북괴측이 「맥아더」장군의 항복요구를 묵살해버리자 「맥아더」장군은 「워커」장군에게 38선이북으로의 진격준비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앞서 9월30일 국회에서는 신익희 의장 사회로 지청천·정일형·서민호 의원 등의 제안으로 38선 돌파작전 요청의 메시지를 유엔총회에 보내자고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공산군에게 희생된 줄 알았던 모윤숙씨와 박순천 의원이 살아있다는 보고를 받고 대통령은 무척 기뻐했다.
우리는 다시 부산임시관저로 돌아왔다. 대통령의 뜻에 따라 유엔군장성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 접대하기로 했다.
나는 양지사부인과 손원일 제독부인을 불러 상의, 점심시간을 택해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 그리고 약간의 한과를 준비하기로 했다.
모-박의원 생존소식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이전 경무대에서 파티를 열었을 때 초청 받은 귀빈 중에는 대통령의 초대를 기념할 목적으로 가끔 포크나 티스푼 또는 기념이 될만한 작은 집기 등을 슬쩍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었다.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부족해 쩔쩔매는 판인데 그나마 또 없어지면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그래서 조금 차기는 하지만 오미자차에 잣을 띄워 음료로 내놓고 손으로 집을 수 있는 샌드위치를 대접키로 한 것이다.
오늘은 손제독부인이 통바지(몸뻬)대신 치마를 입고 왔다. 손제독부인은 부상병 뒷바라지와 진해 해군공관에서 유엔군장병들을 접대하느라 늘 바빴기 때문에 항상 통바지 차림이어서 대통령은 그녀를 보고 『바지부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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