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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문학 터치] 질척한 삶, 사소한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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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왼팔 없는 노인이 양팔 들어 기지개 켰다는 말에 놀라지 말라. 그대는 긴 머리 짧게 쳤는데도 덜미에 자꾸 손 갔던 적 없는가. 달려오는 지하철 앞으로 승차라도 하듯 무연히 걸음을 뗐다 죽은 여자도 이해할 일이다. 신호등 빨간데도 무심코 두세 발짝 옮겼다 경적 소리에 소스라친 일, 그대는 없는가. 옛 애인 우연히 만나서 사랑도 아니고 욕정도 아닌, 일테면 익숙한 은밀함 따위의 감정에 끌려 슬쩍 외도를 꿈꾼 적 있으면, 친구 상갓집에서 만난 옛 애인과 옛날 그 여관에서 하룻밤 지내는 얘기에 동조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네 이야기인 거다. 괴이쩍어 보여도 바탕은 같은 거다. 이장욱의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은 언뜻 허무맹랑한 듯 보여도 익숙하고 후줄근한 우리네 삶을 냉철하고도 적확하게 재현한 거다.

사실 소설은 영 불친절하다. 구성은 복잡하고, 상징적 기호와 팬터지적 요소가 수시로 돌출하고, 과대망상에 빠졌거나 기이한 편력에 휩싸인 인물이 등장하고, 그 괴상한 인물은 이름없이 남자와 여자로만 불린다. 그럼에도 명징한 구석이 있다. 짧고 건조한 신문기사형 문체로 중계하듯 써내려간 덕도 있겠지만, 아수라장 같은 우리네 삶을 추적하듯 들여다 봤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에 사람이 모인다. 각자 사연을 달고 각자 목적에 따라 찾아든다. 공통점이라곤 한 날 한 시 한 전철역에 있다는 것일 뿐. 서로에 간섭할 의사도 없다. 타인으로서 같은 공간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존재만으로 이미 타인은 심하게 간섭당한다. 관계는 없으나 있기도 한 것이다.

닷새 전 두통에 걸린 여자가 지하철로 뛰어들고, 그 지하철을 운전한 기관사가 뒤이어 뛰어들고, 기관사의 대학 친구는 옛 애인과 만나고, 그들은 7월26일 오전 6시35분 지하철역에 나오고, 가판대 외팔이 노인도 마침 그때 역에 나오고, 이들 사이에 서있던 '나'는 봉변을 당한다. 하여 '확실히 이 모든 것은 한 여자의 두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가 소개를 덧붙인다. 올 37세인 그는 11년 전 등단한 시인이자 평론가다. 시단에선 진작에 주목을 받았다. 그런 그가 올해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시와 소설에 관하여 그는 "등소평의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의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시 '객관적인 아침'에 따르면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기에 아침은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 아침에도 전봇대 꼭대기 까치의 눈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구름 아래 희미한 풍경일 것이다. 한 풍경 안에 있기에 객관적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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