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4)제79화 육사졸업생들(237)장창국|파월동의안 국회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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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는 65년7월2일 국무회의에서 증강된 l개전투사단을 월남에 파병하기로 의결하고 당시 정부대변인이었던 홍종철공보부장관을 통해 이를 공식 발표했다.
전투사단 파병 동의안은 7월12일국회에 제출되었으며 이틀후인 7월12일 본회의에 보고되었다. 당시 여야는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처리를 놓고 팽팽히 맞서고 있던 참이었다.
공화당은 이 두 동의안을 이례적으로 야간국회에 보고, 접수해버릴작전을 세웠으나 이를 눈치챈 야당은 소장의원들을 동원해서 단상을 점거, 실력으로 발의를 저지시키기로 당론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 8시 반이 조금 지나 화당이 먼저 단상을 점거해 버렸다. 공화당 원내부총무였던 이만섭의원의 『의장석을 지키라』는 고함이 일어지자 1백여명의 공화당의원들이 단상으로 올라가 의장석 주의를 포위했으며 야당의원들도 뛰따라 올라가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효상국회의장이 민중당 청년당원들에게 제지당해 본회의장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장경순부의장이 재빨리 사회봉을 잡았다.
『한일협정 비준동의안과 전투사단 파병동의안이 정부로부터 제출되였읍니다. 이 의안을 외무위와 국방위에 회부합니다』고 말하고 산회를 선포해 버렸다. 그 다음날 신문들은 어떻게 시간을 쟀는지 몰라도 장부의장이 사회봉을 잡았던 시간이 불과 56초 동안이었다고 보도했었다.
단상 난투극까지 벌이면서 국회에 제출된 파병동의안의 주문은 『대공투쟁을 지원해 달라는 월남공화국정부의 전투부대 증파요청에 의하여 기 파견된 2천6백명 외에 추가적으로 국군1개사단및 필요한 지원부대를 한월양국간의 협의 또는 대한민국정부가 정하는 기간까지 월남에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투사단 파병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정식으로 접수되었지만 야당은 물론 공화당안에서도 반대의견이 높았다.
공화당 당의장이던 정구영옹(작고)도 반대의사를 갖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김성은국방장관은 합참의장인 나에게 파견부대 편성을 지시해 놓고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화당중진들에게도 전투사단 파병에 대한사전브리핑를 하러다녔다. 김장관은 6월1일 정구영 당의장댁을 방문, 전투사단 파견에 대한 공화당의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정의장은 이 자리에서 매우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월남전의 전투가 치열하다는데 만일에 전사자의 유해를 메고 유족들이 국회앞에서 데모라도 벌인다면 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겠느냐』면서 『국회통과가 어려울것』 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의장의 면담결과를 전해들은 박대통령은 『국회안에서의 반대여론이 두렵고 그런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없는 공화당 정부라면 이날로 깃발을 내리고 모두 사퇴해야지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의장은 얼마후 당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당총재 상담역을 지내다 74년에는 끝내 공화당을 탈당했지만 아마 전투사단 파월때부터 박대통령과사이가 벌어졌던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투사단 파병동의안 표결때 공화당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부표를 던졌던 박종태의원도 국회발언을 통해 『미국은 월남에서 많은 손실을 보고 있으나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어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소 양진영의 힘의 밸런스에 의해서 태어났고 힘의밸런스에 의해 존재하는 나라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여론을 무시하고는 존립할 수 없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를 고려할 때 나는 당론 여하를 막론하고 원칙적으로 파병에 반대한다』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뭏든 3차파병 동의안은 우여곡절 끝에 8월13일 여당과 무소속 의원만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표결에 들어가 재석 1백4명중 가 1백1표, 부 l표(박종태의원), 기권2표 (김정근·임병수 공화당소속의원)로 가결되었다.
이같은 국회에서의 진지한 파병 찬반논의는 나를 포함한 군관계자들이 미군관계자들과 파병문제를 협의하는데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다고생각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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