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파병실무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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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는 당초 제2의 월남파병안을 그해 (64년) 12월29일부터 시작되는 제46회 임시국회에서 전격적으로 동의를 얻고 1월중에 파병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크리스머스와 일요일도 없이 김종오합참의장은 「하우즈」 유엔군사령관등 8군관계자를 만났고 합창간부들을 비롯한 군수뇌들도 쫓기다시피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었다는 것이다.
12월27일 합참기밀실에서 소집된 제1차 각군실무자회의에서는 65년1월10일께 파월부대가 출발할수 있게 12월31일까지 부대를 긴급히 편성하도록 결정했다.
29일 임시국회개회식이 끝난직후 김성은국방장관은 박원석공군참모총장을 대동하고 이효선국회의장을 방문했다.
김장관은 이자리에서 미국에서 국군의 증파요청이 있었음을 밝히고 31일 국회본회의에서 파병동의안을 퉁과시켜줄것을 요청한뒤 이튿날(30일)전격적으로 대월남추가병력지원 동의안을 국회에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30일 열린 공화당의원 총회분위기는 의외로 험악했다.
『이문제는 간단히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따질것은 따져 충분한 난상토의를 거쳐 결정해야한다』 는 격앙된 분위기로 본회의상정이 일단 보류됐다.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가장 강경하게 파병반대론을 들고 나왔던 사람은 국방위소속의 차지철의원이었다고한다.
그는 의원총회에서 『월남의 유력자와 부자들은 모두 자식들을 외국에 피신시켜 놓고 있다. 자기들 자식들은 안전지대에서 향락을 누리는데 왜 우리장병들이 그들 대신 피를 흘려야 하는가』 라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예정대로 31일 다시 합참기밀실에서 파병에 관한 제2차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 참석자는 합참각국장과 국방부관계자, 각군 작전참모를 비롯한 관계관들이었다.
회의에서는 부대편성 내용·출발예정일·선발대편성 훈련·부대환송식문제등에 대해 광범위한 토의가 이뤄졌다고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우선 부대편성을△육군l개공병대대△육군1개수송중대△해병l개공병중대와△육군1개정비대대△근무대△부대본부△해군 LST 1척의 승무원등으로 구성, 장교 1백20명과 사병 1천8백64명등 총1천9백84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또 부대파견에 앞서 선발대를 1월8일 사이공에 보내기로하고 단장에는 이미 지난번 신당동회의때 김종오합참의장이 결정한 이훈섭준장 (당시 합참군수국장대리·육사7기)을 임명했다.
단원에는 이동외과병원 파월때 이장군과 함께 사이공에 가서 실무약정을 맺고 돌아온 육본군수참모부의 김영일대령 (육사8기특별·소장예편·현해외개발공사사장) 과 육군공병대의 김영연소령(육사11기·대령예편·현주식회사 한성 생산담당상무) 수송대의 안창화중위 (대위예편·전철도청장) 해병대의 권기범중위, 그리고 타자요원으로 김종룡상병 (비들기부대근무중 전사) 김복춘일병등 7명으로 구성했다.
2차로 파견될 부대는 공병을 주축으로 복구·건설을 주임무로한 부대였지만 전선과 후방이 따로 없는 월남전의 특성을 감안해 자체경비대대가 포함되었던것이다.
한편 정부는 제2차 월남파병 동의안이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격」 으로 여당인 공화당의 반발로 연내 국회통과 계획이 백지화되자 계획자체를 보다 신중히 다루기로 결정, 주월대사관을 통해 월남정부로부터 공식지원요청서를 받도록했다.
65년1월2일자로 「팜·담낭」 월남외상이 이동원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지원군 증파요청 서한은 『(전략) 월남공화국은 대홍수를 만나 국내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당했습니다.
따라서 월남군은 평정과업과 아울러 자체후방지원을 담당하면서 피해지역재건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월남군은 비전투지원부대, 특히 공방단및 자체경비 수단을 구비한 기술단, 그리고 부대및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한 수송부대가 극히 필요한 것입니다.
월남공화국정부는 상기 지원분야에 대해 한국정부로부터 조속한 시일안에 가능한 모든 원조가 도착하면 감사하겠읍니다』 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국방부는 l월8일 홍종철공보부장관에 의해 「국군2천명 파월」 계획이 정식으로 발표되자 각군에 전언통신을보내 1월28일까지 파월부대를 경기도가평군하면현리에 있는 부대주둔지로 집결시키도록 하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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