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때와 만날 때 이산30여년…애절한 사록들<9>|김창선·창벽씨 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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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족상잔의 비극이 바로 우리 형제의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같습니다』
6·25동란중 형은 대한민국 경찰로, 동생은 인민군 전사로 참전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비극의 형제가 37년만에 자유의 품에서 재회했다.
김창선씨 (56·인쇄소경영·서울 상봉동124의60)와 동생 창벽씨(50·요리사·서울청량리동92의2)는 서울여의도 KBS건물에 붙인 벽보를 통해 상봉했다.
『해방이 되자 지주집안이라고 반동으로 몰렸지요. 가산은 몰수되고 아버님은 감옥에 들어갔읍니다』
김씨형제의 고향은 평북강계군전천면.
강계유지였던 집안은 풍비박산했다.
당시 강계농림고교3년에 재학중이었던 창선씨는 46년4월공산학정을 피해 고향을 탈출했다.
동생 창벽씨는 나이가 어려 집안에 남았고 부모는 조부모릍 모셔야해 월남을 포기했다.
창선씨는 서울에 내려와「서북청년회」 에 가입, 남한에서 암약하는 공산당 타도에 앞장섰다.
47년11월,수도경찰학교 순경모집에 응시해 경찰에 투신했다.
『경찰학교 졸업성적이 좋아 이화장에 파견돼 이박사를 경호했읍니다』
창선씨는 6·25를 1년앞두고 간부후보생 양성소인 경찰전문학교 시험에 응시, /49년 경위로 임관했다.
6·25때는 낙동강전선에서 지열한 전투를 벌였다.
『나이어린 동생이 적군으로 참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북진통일을 해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 했지요』
형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을때 동생은 북괴군보병 전사로 전남지방의 또다른 전선에서 따발총을 들고 있었다.
당시 창벽씨의 나이는 17세.
『북괴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목총훈련만 1주일간한후 바로 전선에 나가라고 합니다』
8월말 전남순천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자 후퇴명령이 내렸지요.그러나 전남영암에서 자수권유비라를 보고 월남한 형을 만날수 있다는 확신으로 투항했읍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2년간 있다 반공포로로 석방됐다.
이후 국군에 자원 입대,6사단 포병대대에서 3년간 복무한후 병장으로 제대했다.
『제대후 친구의 권유로 요리기술을 배웠습니다. 평양냉면은 특히 자신있읍니다』창벽씨는 15년간 서울명동 삼오정등 유명 한식집에서 요리사로 일해왔다.
65년 중매로 결혼한 부인(42) 사이에 1남3녀.
동생이 인민군에서 반공포로, 국군사병, 요리사를 거치는 동안 형은 경찰복을 벗은후 전매청에 들어가 부산전매소장까지 지냈다.
『동생이 자유대한에 있는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같은 구(동대문구)에 살고있었다니….』
창선씨는 49년 충북 영동경찰서에 재직할때 국민학교 교사였던 부인(56)과 중매로 결혼했다.
슬하에 4형제중 3형제가 스포츠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장남인 재홍씨(34)는서울 오산고 야구감독이고 3남 현홍씨(27)는 프로야구 OB베어즈의 투수.
두 형제의 감회는 6· 25때 「남과 북」 으로 갈려 전선을 오갔기에 더욱 깊었다.

<박보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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