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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을 유전자 검사] 하. 신뢰 높일 방법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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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빈센트는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검사를 받고 이런 '낙인'이 찍힌다. 어린이집에선 사고 위험이 크다며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꿈이 있지만 가족조차 비웃을 뿐이다.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고, 번듯한 직장에서는 그를 거부한다. 유전 정보에 의한 차별은 물론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그러나 무심코 흘린 머리카락 한 올, 서류 봉투에 묻은 침 등으로도 그에 대한 유전자 검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1997년 앤드루 니콜이 감독한 영화 '가타카'가 그려낸 '유전자계급사회'의 모습이다. 단순히 공상과학영화로 분류하기엔 우리의 현실이 빠르게 영화 속 내용에 다가서고 있다. 이미 국가나 기업이 과학수사, 질병치료 연구, 보험료 책정 등에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유전자 검사에 대한 맹신이나 오.남용을 초래하는 현재의 제도를 당장 개선해야 하는 이유다.

◆ 의료계가 나서 오.남용 줄여야=유전자 검사에 대한 소비자들의 과신을 부추기는 데 일부 의료기관도 일조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유명 병원은 최근까지 특정 검사업체와 손을 잡고 건강검진센터의 선택검사 프로그램으로 질병 예측 관련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다. 최근 논란이 일자 중단하기는 했지만 그 검사업체 홈페이지엔 아직도 이 병원이 제휴의료기관으로 명시돼 있다.

울산대 의대 서울아산병원의 유한욱 교수는 "일반 의사들도 유전자 검사에 대한 연구 현황과 한계 등에 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환자들에게 다양한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도로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업체들이 의료기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현행법 때문이다. 다소 모호한 문구가 논란이 됐지만 최근 복지부는 질병의 진단은 물론, 예측과 관련된 검사도 의료기관의 의뢰를 받아야만 시행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일부 유전자 검사업체들이 병.의원 및 약국과 뒷거래를 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한 업체가 올 초 의료기관에 보낸 제안서에는 "회원 병원이 되면 우리가 검사한 학생을 보호자와 함께 보내주겠다. 검사 결과를 설명해 주면 1인당 17000원을, 보호자도 검사를 하도록 (홍보) 해주면 검사비의 40%를 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의료계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유 교수는 "법에만 의존하지 말고 미국.일본처럼 학계나 의료계가 유전자 검사에 대한 구체적인 표준지침을 만들어 준수토록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의사들이 매년 받도록 돼 있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유전자 검사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 상담사 등 전문 인력 양성 필요=소비자가 유전자 검사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갖지 않도록 하고, 검사 결과를 차분히 상담해줄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국내의 유전자 상담사들은 오히려 이런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유전자 검사업체들이 지점.대리점을 통해 유전자 상담사를 모집하면, 이 유전자 상담사는 소비자를 끌어와 업체에 검사를 맡긴다. 업체들은 영업망 확장 차원에서 일반 교육업체나 건강관리업체 종사자들에게도 유전자 상담사 자격증 취득을 적극 권하고 있다.

자격 심사도 업체들이 직접 해오다가 지난해 10월부터는 과학기술부 산하 사단법인 단체인 '생명공학유전자학회'가 맡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8~32시간에 불과한 교육으로 전문성을 키우기는 불가능하다. 또 자격증을 발급하는 학회의 임원진 대부분이 학회가 상담사 교육기관으로 인정하는 검사업체의 대표와 다른 검사업체의 전.현직 경영진으로 구성돼 있는 것도 문제다.

아주대 의대 김현주(의학유전학과)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엔 임상유전학 전문의가 따로 있다"며 "만약 의사가 아닌 사람이 유전자 상담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원 석사과정급의 교육과 임상실습을 거쳐야 하는 등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 엄격한 유전자 정보 관리 필요=유전자 검사기관들이 획득한 유전자 정보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전혀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의 박찬 유전체역학정보실장은 "국공립병원들조차 유전자 검사를 할 때 검체나 검사 결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수검자의 동의서를 제대로 받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개인 유전 정보가 연구 목적 등으로 문제의식 없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복지부의 다른 관계자도 "검사업체들이 본인의 동의 없이 검체나 검사 결과를 다른 연구자나 유전자 검사기술 관련 업체 등에 판매하더라도 현재로선 이를 적발할 행정력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의료 전문인 신현호 변호사는 "관련 법만 만들어놓고 각종 불법적 행위로 인한 소비자의 피해를 지금까지 방치한 것은 정부의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비만.치매 등 20종 검사 제한 추진
정부, 대책 마련 나서

보건복지부는 10일 열린 제2차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금지하거나 제한해야 할 유전자 검사'를 주요 안건으로 올렸다. 복지부의 김헌주 생명윤리정책과장은 "일부 검사 기관이 일반인은 물론 의료인조차 유전 정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을 악용,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검사를 남발하고 있다"며 "불법 여부를 구체적으로 판단할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현행법(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도 '과학적 입증이 불확실해 검사 대상자를 오도할 우려가 있는 신체 외관이나 성격에 관한 유전자검사' 등이 금지돼 있지만 이를 보다 구체화하겠다는 얘기다.

이번에 복지부가 제한 지침을 마련 중인 검사 항목은 비만.체력.지능.당뇨.치매 등 20종이다. 이 검사들의 과학적 적정성과 의학적 효용성, 적용상의 한계, 바람직한 표시.광고의 방향 등을 검사 종류별로 적시해 불법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한국유전자검사평가원에서 의견을 수렴, 심의위원회 산하 유전자전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관련 법령을 개정할 계획이다.

정부는 또 유전자 검사기관의 질을 정기적으로 점검할 방침이다. 복지부는 이를 위해 산하 비영리법인으로 유전자검사평가원의 설립을 최근 허가했다. 평가원의 김대원(대한진단검사의학회장) 이사장은 "복지부 지정 기관으로서 유전자 검사기관들에 대해 검사 결과의 정확도, 검사 과정의 적정성, 검사 시설.장비의 적합성, 검사 인력의 적정성 등을 평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평가원에는 대한진단검사의학회.대한병리학회.대한임상검사정도관리협회.대한의학유전학회.대한법의학회 등 관련 5개 단체가 참여했다.

김 과장은 "일부 유전병 진단은 물론 친자 확인, 실종 어린이 찾기 등 유전자 검사의 긍정적인 사용 범위도 넓다"며 "국민이 유전자 검사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해 장점은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홍보활동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 유전 정보의 오.남용을 막기 위한 정부 대책은 여전히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현행 생명윤리법에도 유전자 검사 시 개인정보 보호 조치나 유전 정보를 이용한 교육.고용.승진.보험 등에서의 차별 금지 조항 등이 들어있지만 이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의학유전학회는 내년 3월부터 유전자상담사 전문과정 교육 및 인증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외국에선
검사 한계 설명
유전 정보 보호

미국과 일본에도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는 대학병원.연구소.업체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1997년 유전자검사특별위원회가 이미 상세한 내용의 가이드 라인을 마련했다. 여기에선 유전학적 전문지식을 갖춘 의료인이 검사 전에 수검자에게 유전자 검사의 내용과 한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의대나 전공의 프로그램에 유전학 분야를 늘려 일반 의사들도 적절하고 충분한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다.

일본도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혼란을 거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의학계의 노력 등으로 자정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를테면 일본의 ㈜바이오리플레이스라는 업체는 골다공증이나 알츠하이머성 치매 등 질병 예측 검사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홈페이지의 검사 소개란에서부터 검사의 한계를 충분히 설명한다. 이와 함께 검사 전에 제휴 의료기관의 의사가 다시 한번 확실히 설명하고 검사 동의를 받도록 한다. 또 수검자로부터 접수한 검체는 식별을 위한 암호만 동봉해 검사실로 보내고 개인 신상 정보는 따로 의료기관으로 보낸다. 의료기관은 검사 결과를 곧장 검사실로부터 받아 개인정보와 결합해 환자를 상담한다. 따라서 업체는 개인의 유전 정보를 알 수가 없다.

미국에선 2000년 한 철도회사가 직업병을 앓는 직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직원들의 동의 없이 유전자 검사를 시행했다가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발병 원인을 직업적 특성보다는 개인의 신경장애 유전자 보유 여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영국의 보험자협회도 알츠하이머성 치매나 유방암 등 일부 유전자 검사 결과를 개인별 생명 보험료 책정에 이용할 수 있도록 요구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미국의 IBM사가 유전자 정보를 고용이나 퇴직금 및 의료지원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식 천명해 화제가 됐다.

특별취재팀=고종관.김정수.강승민 기자, 오혜재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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