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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연금 개혁에 파업 몸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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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1880년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노후복지에 획기적인 방안을 도입했다. 국가가 개인의 노후를 책임질 수 있도록 공적연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아이디어는 이후 1백여년간 유럽에서 복지국가 체제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유럽의 자랑거리였던 연금제도가 최근 유럽 전역에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오스트리아에 이어 프랑스에서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유럽 정부들이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금제도를 개혁하려는 것은 연금재정이 계속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연금재정은 2020년에 5백억유로, 2040년에는 1천억유로의 적자가 예상되며, 다른 유럽 국가도 연금재정 악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원인은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반면 출산율은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활동인구가 줄어 일하는 계층이 은퇴한 노령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이 점점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연금재정의 악화를 막으려면 보험료를 더 많이 거두거나 연금액을 줄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연금 납입기간을 2년6개월 연장하는 개혁안을 추진하는 것이나 오스트리아가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연령을 현행 60세에서 67세로, 연금 보험료 납부기간을 40년에서 45년으로 높이려는 것도 보험료 수입을 늘리고 연금 지출을 줄이자는 의도에서다.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독일 연금을 개혁하려면) 우리 모두 더 오래 일해야 한다"며 사민당 출신답지 않게 노동시간의 연장을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기에 몰린 유럽식 연금제도=공적연금제도는 운영방식에 따라 부과식(pay-as-you-go system)과 적립식(pre-funding system)으로 나뉜다. 유럽이 채택하고 있는 부과식은 현 세대의 노동자들이 소득의 일정 부분을 갹출해 앞 세대의 노동자(현재의 노령층)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형태다. 따라서 인구 노령화로 피부양인구 비율이 높아질수록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선 보험료율을 계속 높이거나 연금액을 줄여야 한다.

노조 등 이해당사자들은 이같은 연금개혁에 반대한다. 프랑스는 1990년대 초반부터 연금개혁을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95년 알랭 쥐페 총리는 국영철도(SNCF) 등 공공부문 연금을 개혁하려다 대규모 반대시위에 부닥쳐 실각했다.

칠레가 시행 중인 적립식 제도는 연금 가입자가 소득의 일정 부분을 적립하고 이를 기초로 은퇴한 후 연금을 지급받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자기가 적립한 만큼 은퇴 후 돌려받기 때문에 기금이 고갈될 우려는 없다. 하지만 소득 재분배 기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적립식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럽의 부과식 연금과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칠레처럼 개인별 계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전체 적립액을 관리하면서 연금 가입자가 은퇴할 때 급여의 일정 수준을 지급하기로 약속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들은 보험료 원리금의 1.5~3.8배에 달하는 연금을 돌려받게 돼 있다. 따라서 적게 내고 많이 타가는 현재의 연금체제를 조기에 개선하지 않는 한 조만간 유럽과 같은 연금재정의 고갈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재정 고갈을 막으려면 후세대가 높은 보험료율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

또 연금 개혁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정치적 부담 때문에 아무도 나서기를 꺼려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기업연금 대안될까=미국과 영국은 노후복지를 위한 연금기능을 기업연금 등 민간부문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한국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기업연금은 기업이나 노동자가 돈을 적립해 퇴직 이후에 연금 또는 일시금 형태로 지급받는 제도로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이 있다.

확정급여형은 연금액이 미리 정해져 있어 연금운용에 대한 위험을 기업이 부담하는 방식이다. 돈을 잘 굴려 이익이 남으면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지만 운용실적이 나쁘면 기업 재무제표에 구멍이 난다.

확정기여형은 연금액을 미리 정하지 않는 대신 매년 적립한 금액을 운용실적에 따라 퇴직할 때 돌려받는 방식으로 투자위험을 노동자가 부담한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미국과 영국 등 확정급여형 연금을 채택하고 있는 기업들의 연금적자가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증시 침체로 크게 늘었다고 보도했다. 투자은행인 HSBC는 S&P100 기업들의 연금적자가 3천4백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확정급여형 연금을 채택한 미국 1백대 기업 중 연금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기업은 13개에 불과했다. 제너럴 모터스는 무려 2백54억달러의 연금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기업이 고용자의 노후까지 책임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서경호 기자

<사진설명>

지난 13일 (현지시간)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안에 항의하는 공공부문 노조의 총파업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항공기·기차·버스 등이 멈췄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파리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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