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라이스가 버시바우 보낸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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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제 서울에 부임한 알렉산더 버시바우(52) 신임 주한 미국 대사는 국무부에서 손꼽히는 유럽통이다. 28년에 걸친 직업 외교관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예일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소련과 동유럽 문제 및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1977년 국무부에 들어간 그의 첫 임지도 유럽이었다. 모스크바와 런던은 그의 주무대였다. 장기간에 걸친 유럽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국무부 요직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대사와 주 러시아 대사를 역임했다.

'붉은 제국'이 침몰을 앞두고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던 80년대 말 그는 국무부 소련과장을 지냈다. 그때 백악관에서 소련 문제를 담당하던 실무자가 지금의 국무장관인 콘돌리자 라이스다.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30대 초반의 스탠퍼드대 교수였던 라이스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소련담당국장으로 발탁해 '냉전 체제의 해체 관리'라는 막중한 업무를 맡겼다. 버시바우는 라이스와 호흡을 맞추며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련의 해체 과정을 관리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지도에서 사라지면서 생긴 힘의 공백을 메우는 문제는 미국 포스트 냉전 외교의 핵심 과제였다. 소련의 내적 폭발을 방지하고,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 미국 중심의 신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고도의 상상력과 정치(精緻)한 외교술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열쇠는 나토의 재편과 확장이었다.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대응하는 대서양 집단안보체제로 기능해 온 나토의 성격과 위상을 탈냉전 환경에 맞춰 조정하면서 중.동구로 세력을 넓혀가는 것이 버시바우에게 맡겨진 과제였다. 동시에 나토의 동진(東進)에 따른 러시아의 불안과 불만도 다독여야 했다. 난제와 씨름하며 나토의 확장과 러시아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실무자가 버시바우다. 그 공로로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조셉 크루젤 평화상'을 받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는 '우수 외교관상'을 받았다.

2005년의 한반도는 대전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6자회담에서 합의된 한반도 비핵화의 대원칙이 어떻게 구현되느냐에 따라 동북아 질서는 요동칠 수밖에 없다. 동북아 질서의 핵심 변수인 미.북 관계의 장래도 여기에 달려 있다.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과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이 상징하듯 한국은 심각한 전환기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남북 관계는 외형상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올 한 해 북한을 찾는 한국인만 10만 명에 이르고, 남북한 교역규모가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미 동맹관계의 재조정은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대두돼 있다. 이 시점에 라이스가 버시바우를 모스크바에서 빼내 서울로 보낸 함의를 간과해선 안 된다.

버시바우는 부임에 앞서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 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냉전 시대의 대단원이 한반도에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한반도 분단 극복은 분명히 한.미 공통의 목표"라는 말도 했다.

한반도 통일은 생각처럼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짧게는 8년을 보는 사람도 있고, 길게는 15년을 보는 사람도 있다. 그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것은 미국 외교에 주어진 또 하나의 중대한 도전이다.

버시바우는 역대 주한 미 대사 중 최고 거물급이다. 또 라이스와 마찬가지로 유럽통이고, 러시아 전문가다. 냉전 종식을 전후해 버시바우가 유럽에서 갈고닦은 전환기 외교의 기량을 이제 한반도에서 발휘할 때가 됐다는 것이 라이스의 판단은 아닐까.

배명복 국제담당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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