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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람] 사스 덕에 스타 된 권준욱 국립보건원 방역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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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기승을 부리면서 연일 방송과 신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사스 방역의 최전선에 서있는 국립보건원 권준욱(權埈郁.38) 방역과장이다. 16일은 사스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간 지 딱 두달째 되는 날.

사스문제가 터진 뒤 權과장은 집에 들어가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다. 밤 늦게라도 일선에서 사스 관련 보고가 들어오면 즉시 판단을 해 지침을 내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초등학교 4학년)에게 미안하죠. 어린이날에도 꼬박 일했으니까요. 하지만 이해를 잘 해주는 것 같아요. 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말라'며 오히려 아빠 걱정을 해주더군요"

공무원인 權과장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다. 그가 공무원의 길을 선택하자 의사로 출세하길 바랐던 집안에서는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기울어진 가세를 장남이 일으켜 주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權과장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의예과 1학년 종강하던 날이었어요. 친구들과 맥주 한잔 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맹장수술을 받고 퇴원하신 아버지가 다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하더군요. 병원에 달려가보니 이미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시신이 누워있는 침대차를 끌고 병원 복도를 나오는데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이후 공부도 안 하고 방황을 많이 했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에게 김문식(金文湜) 당시 보건원 방역과장(현 국립보건원장)의 강의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21세기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이란 강의였는데 앞으로 의사 공무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고 한다.

"본과 2학년 때였어요. 강의를 듣는 순간 이게 내가 갈 길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 뒤 의대 선배인 金원장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니 그 때의 만남은 운명인 것 같아요."

權과장은 대학 졸업 후 공중보건의로 일했다. 당시 충남 서천 지역에 콜레라가 자주 창궐해 요즘처럼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고 한다. 공중보건의를 마친 그는 1992년 보건원 방역과 사무관으로 특채됐다. 사무관 시절 보건 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미국 미시간대 보건대학원에 유학해 3년6개월 만에 석.박사과정을 모두 마쳤다.

權과장은 박사과정을 마친 뒤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로부터 채용 제의를 받았다. UCLA 의대를 나와 역학조사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지도교수가 적극 추천한 것이다.

CDC는 우리나라 보건원의 방역대책본부와 같은 기관으로 직원 8천5백명 중 3분의 1이 의사다. 미국에서는 CDC에서 일한 경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의사들도 선호하는 직장이다.

"마음대로 연구를 할 수 있는 CDC의 여건이 정말 부러웠어요. 연봉은 많지 않지만 충분한 연구비가 주어지고 권위를 인정받죠. 하지만 한국에서 할 일도 많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공부를 한 만큼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복지부로 돌아온 그는 이태복 장관 시절 요직인 보건정책 과장을 맡았다. 나이로 보나 공무원 경력으로 보나 파격이었다. 과장 시절 그는 일을 몰고 다녔다. 생명윤리법과 의료분쟁조정법 제정의 실무작업을 주도했고 의사 파업을 막는 데도 힘을 쏟았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매력이 있어요. 제가 관여한 정책이 잘 집행돼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묘한 쾌감을 느끼죠. 저만 그런 게 아니고 공중보건의들도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일이 힘들지만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성취감이 있다고 말이죠."

요즘 TV에 자주 등장하는 權과장은 방송기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멘트를 딸 때 한번도 NG를 낸 적이 없을 정도로 '방송 체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는 쉬운 것 같은데 기자 브리핑이 어려운 것 같아요. 브리핑에선 기자들이 워낙 꼬치꼬치 캐물어서 아직 말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통제하는 게 아주 힘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글=정철근, 사진=김경빈 기자

*** 약력

▶1965년 서울생 ▶연세대 의대 ▶92년 보사부 사무관 특채 ▶94년 미국 미시간대 보건대학원 유학 ▶2001년 서기관(4급) 승진 ▶2001년 보건원 전염병정보관리과장 ▶2002년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장 ▶2002년 12월 보건원 방역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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