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이산30여년……애절한 사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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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언니, 왜 나만 버렸어.』33년 만에 만난 윤송자(48 서울청량리동 142) , 길자(46· 서울 옥수동l96의5) 두 언니에게 막내 동생 윤애자씨 (42· 경기도의정부시 3동 84) 는 한 맺힌 투정을 했다.
그러나 곧 세 자매는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에 울며 웃었다.
이들이 헤어진 것은 6·25직전인 50년 봄. 서울마포가 고향으로 해방직후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다. 어머니마저 여의게 되자 큰언니인 송자씨는 14살의 나이로 12살, 8살의 어린 두 동생을 돌볼 수 없어 막내인 애자씨를 동두천의 고모집에 맡겼다. 6 25전까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여서 이들 자매는 자주 만났지만 난리통에 고모가 수원으로 피난을 가면서 헤어지게 된 것.
함께 살던 송자 길자자매도 피난길에 흩어졌다. 언니는 강화도, 동생은 경기도 고양군 일산으로 갔다. 막내인 애자씨는 고모의 소개로 피난중 양어머니를 만나 의정부에 살게 됐고 흩어진 두 언니는 각각 가정부로 들어갔다.
이때문에 이들 세자매는 모두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특히 막내인 애자씨는 17년간 수양딸 노릇을 하면서 학교문 앞을 찾아가 같은 또래의 소녀들이 교복차림에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는 모습을 숨어서 보며 눈물을 흘린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들은 각각 어렴풋이나마 언니 동생 생각이 떠올랐지만 누구도 찾아나설 엄두를 낼수 없었다.
특히 식장에 데리고 들어갈 보호자를 찾지 못해 애자씨는 사흘을 두고 울었다.
이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슬하에 1남3녀씩을 두었다. 결혼으로 생활이 안정되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서로를 찾아나섰다.
막내인 애자씨는 고향인 마포부근을 헤맸고 둘째언니 길자씨는 동생이있던 동두천 고모집 부근을 찾았으나 번번이 허사였다.
길자씨는 특히 언니가 이문동에 사는것 같다는 소문을 얼핏 듣고 이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혹시 아이가 있다면 국민학교에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 부근 국민학교를 찾아가 『어머니가 윤송자인 학생이 있느냐』고 묻고 다녔다. 71년 기적처럼 이문국교에서 언니의 아들인 조카를 찾아내 위로 두자매는 21년만에 극적인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내 애자씨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경찰 컴퓨터에 의뢰도 해보고 반상회를 통해 동두천 일대에 5천장의 전단도 뿌렸다. 전화번호부를 뒤져「윤애자」란 이름은 모조리 돌려보았으나 허사였고 일간지·방송등에 광고를 내기도 했다. 혹시 동생이 전화번호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명의도 남편이름 아닌「윤길자」로 번호부에 등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 막내인 애자씨는 워낙 어릴 때 헤어져 성이 윤씨라는 것만 알뿐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해 결혼후 윤숙자란 이름으로 가호적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마포구청의 호적에는 아직 애자씨가 처녀로 등재되어있다.
그러나 두 언니가 있었고 수양딸로 남의 집에 보내졌다는 것은 어렴풋이 기억해 이웃들에게 신세타령을 한 것이 두 언니를 찾는 계기가 됐다.
둘째인 길자언니가 KBS에 이런 사연과 함께 「동생 윤애자를 찾는다」는 피킷을 들고 츨연하자 이웃에서 이를 보고 『당신과 닮은 여자가 동생을 찾는데 이름이 다르다』 고 알려주더라는 것.
『아버지, 애자가 왔읍니다』오매불망 혈육을 그리던 애자씨는 언니들과 함께 춘천으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가 엎드린채 일어설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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