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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로봇이 '반퇴'하면 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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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축구 로봇’ 차두리(왼쪽)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30대 중반이지만 그는 힘차고 빠르고 굳세다. 축구팬들은 차두리가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에서 보여준 70m 폭풍 드리블에 찬사를 보내며 그의 대표팀 은퇴를 만류하고 있다. 8강전에서 추가골을 터뜨린 손흥민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차두리.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서울-19800725.

아시안컵 뒤 은퇴한다는 차두리
시간을 거스른 70m 폭풍 질주
조별리그 베스트11에 올라

 ‘축구 로봇’ 차두리(35·서울)의 제품 등록번호다. ‘1세대 로봇’ 차범근(62)의 뒤를 잇는 신형 모델로 제작돼 1980년 출시됐다. 21년 간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지난 2001년 11월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처음 A매치 무대를 밟았고, 이후 14년간 대표팀의 핵심 자원으로 활약했다. A매치 기록(73경기 4골)은 아버지(132경기 59골)에 못미치지만, 팀 공헌도 만큼은 부족함이 없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축구대표팀 4강 신화에 일조했고 스트라이커와 날개 미드필더, 측면 수비수까지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다. 출시 후 35년간 큰 고장이나 오작동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내구성에서도 1세대 로봇(차범근은 33세에 대표팀 은퇴)에 앞섰다. 당초 호주 아시안컵 본선에서 우승을 이끈 뒤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지켜질 지는 미지수다. 축구계 안팎에서 “여전히 생산성이 뛰어나니 사용 마감 시한을 늘려야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아서다.

 ‘베테랑 로봇’ 차두리의 진가는 22일 호주 멜버른 렉탱귤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아시안컵 8강전에서 드러났다. 지리한 0-0 승부가 이어지던 후반 24분 그라운드에 투입돼 우리 대표팀의 공격과 수비 양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0으로 앞선 연장 후반 14분에는 손흥민(23·레버쿠젠)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해 2-0 승리에 기여했다. 우리 진영에서 볼을 잡아 70m를 질주하며 상대 수비수 두 명을 잇따라 제친 뒤 손흥민의 발 앞에 정확하게 볼을 배달하는 장면은 한 편의 만화 같았다. 지난 13일 쿠웨이트와 조별리그 2차전(1-0승)에 이어 두 번째 도움이다. 경기 후 차두리는 “감독이 수비 안정에 신경쓰면서 과감하게 공격에 가담하라고 주문했다”면서 “나는 체력이 남아있었고 상대는 힘들어했다. 이 차이를 활용해 돌파했다”며 미소지었다. 중계를 맡은 이영표 KBS 해설위원은 손흥민의 추가골에 대해 “차두리 지분이 99%쯤 된다”고 칭찬했다.

 아시안컵에서 차두리가 내딛는 걸음은 모두 역사다. 우즈베키스탄전 출장으로 아시안컵 한국 선수 최고령 출전기록을 다시 썼다. 이운재 22세 이하 대표팀 GK코치가 가지고 있던 종전 기록(34세 102일)을 34세 190일로 늘렸다. 아울러 세 차례 아시안컵 본선(2004·2011·2015)에서 총 13경기에 출전해 박지성과 함께 한국선수 최다출장 공동 4위에 올랐다. 4강전 이후 두 경기에 모두 나서면 두 계단 더 올라 이운재·이동국(전북·이상 15경기)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최다기록은 이영표 위원의 16경기다.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를 구성하며 마지막까지 차두리 발탁 여부를 고민했다. 축구 선수로는 황혼을 넘긴 나이인 만큼 체력과 부상 가능성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기우였다. 차두리는 타고난 체력과 스피드에 노련미까지 더해 터치라인을 평정했다. 아시안컵 조별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려 객관적으로도 경기력을 인정받았다.

 특유의 소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선수단의 구심점 역할도 맡았다. 공격 에이스 손흥민은 띠동갑인 차두리를 ‘삼촌’이라 부르며 의지한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이번 아시안컵은 두리 삼촌의 마지막 A매치다. 우승한 뒤 두리 삼촌을 목마 태우고 그라운드를 한바퀴 돌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을 정도다.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 대구 FC 사장은 “4년 전에도 두리는 최고참 선수였지만 제일 어린 흥민이와도 스스럼 없이 어울렸다. 어떤 상황에서든 팀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브라질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차두리가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도 새삼 화제가 됐다. 배성재 아나운서가 중계 도중 차두리의 경기력에 감탄하며 “이런 선수가 왜 월드컵 때는 해설을 했을까요?”라고 말한 게 계기였다. 차두리는 월드컵 본선을 3개월 앞둔 지난해 3월 그리스와의 A매치 평가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소집 직전 왼쪽 허벅지 근육을 다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대표팀이 본격적으로 조직력 다지기에 나서면서 차두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최근 차두리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잡은 문신도 축구팬들의 주목 대상이다. 차두리는 지난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 옆구리에 새긴 ‘바코드 문신’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가족의 생일을 로마자로 변환해 새긴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차두리 로봇설’의 증거로 지목받으며 유명세를 탔다. 양 팔을 빼곡히 채운 현재의 문신은 부인과 결별한 지난 2013년에 새겼다. 당시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은 한 칼럼에서 “(차두리가) 양쪽 팔뚝에 문신을 한 사진을 처음 본 뒤 우리집에 난리가 났다”면서 “본인 말로는 너무 힘들어서,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랬다 한다”고 썼다. 차 감독은 당시 “이제 절대로 경기장에서 짧은 팔 유니폼은 입지 말라”며 아들이 문신을 새긴 것을 안타까워했다.

 차두리는 아버지가 43년전 A매치에 데뷔한 아시안컵 본선 무대를 마지막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벗을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K리그 시상식에서 “아시안컵은 내가 국가대표로 뛰는 마지막 대회다. 이후에도 계속 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반응은 엇갈린다. ‘정상에서 아름답게 물러날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는 의견과 ‘대표팀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력이 여전한 만큼 은퇴를 만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맞서는 모양새다. 많은 축구계 인사들과 네티즌들은 차두리가 대표팀 이력을 이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23일에는 한 포털 사이트에서 ‘차두리 선수 국가대표 은퇴 반대합니다’라는 제목의 서명운동도 시작됐다. 차범근 감독은 아들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나이가 들어야 할 수 있는 플레이도 있으니 선수 생활을 좀 더 하는 게 좋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일을 시작할 시기가 늦어진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 감독은 24일 부인 오은미씨와 함께 호주 시드니로 출국해 4강 이후 아들의 경기를 현지에서 응원한다.

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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