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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여성에 대한 이해 부족이 한국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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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끝없이 추락하는 출산율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이 매번 물거품이 되고 마는 괴로운 현실이다. 이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놓고 한국은 고민하고 있다. 정부는 2006년 이래 100가지도 넘는 정책을 추진하고, 지난 2년간 무려 10조원 넘는 예산을 투입했지만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수 있는 평균 자녀수)은 여전히 1.19명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한국의 출산율은 세계 220위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는 정책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인들이 위기의 심각성을 몰라 정책적 차원에서 적절한 대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수준의 출산율이 지속된다면 100년 안에 한국이라는 민족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자연히 한국어도 만주어처럼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언어로 전락할지 모른다.

 한국인들이 매우 희박한 북한의 서울 포격 가능성은 거론하면서도 출산율 저하라는 또 다른 심각한 위험에는 완전히 침묵한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낮은 출산율은 반도체나 스마트폰의 경쟁력 하락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협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위기는 한국 여성들의 온당한 욕구에 부응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에도 여성의 자녀 양육권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조치에는 게으르다. 또한 한국 남성 대부분이 저출산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이런 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출산율을 높이려면 아이를 양육하면서 동시에 일할 수 있게 하고, 훌륭한 교육이 무료로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둬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이 여전히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실은 인프라나 연구에 대한 투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데도 말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장 풍경부터 살펴보자. 사무실이나 생산현장에 한국 여성들이 앞줄에 앉아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느라 숨 돌릴 틈도 없는데 말이다. 반면 사무실 뒤쪽의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 상사들은 신문을 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들이 어린 자녀들을 직장에 데려가 직장 내 보육시설에서 돌보게 하는 시스템도 정착돼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여성들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도 집에 돌아가 또다시 자녀들의 먹거리와 교육을 책임지느라 몇 시간씩 보내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모든 기업과 연구기관, 대학, 정부 부처가 자체적으로 보육시설을 갖춰 여성 근로자가 출근과 동시에 자녀를 맡겨뒀다가 필요할 때는 근무 중에도 들러볼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사무실 근처에 아이들이 있다면 오히려 더 인간적인 환경이 될 수도 있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또 건물이나 도시를 지을 때 설계 단계에서부터 여성 근무자가 출근과 함께 아이를 맡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런 변화에는 큰 비용이 들 게 분명하지만, 저출산 폭탄을 무시할 때 드는 비용에 비하면 훨씬 더 싸게 먹힌다. 출산율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다면 정책의 우선순위가 먼저 이런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동시에 아이들을 위해 양질의 학교를 세우고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과정을 무료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만 되면 부모 입장에서 사교육에 드는 막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한국의 부모들이 몇 명의 자녀를 둘지 결정할 때 교육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바뀌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최소한 예전처럼 가정당(當) 두 명의 자녀를 두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여성이 일을 하면서도 2~3명의 자녀를 기르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여성 근로자들이 여전히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무렵 필자와 저녁식사를 하던 남성 회사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정책들은 경제적으로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상황을 오도하는 것이다. 그토록 비용이 걱정된다면 회식 술값이나 CEO를 위한 개인 운전사 비용, 그리고 번지르르한 새 사무실 짓는 데 드는 돈을 아끼면 충분히 해결된다. 여성이 자녀를 기르고, 또 그 자녀들이 무럭무럭 크도록 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본적인 여건부터 조성하는 게 순서다.

 자녀를 뒀거나 앞으로 둘 여성에겐 고용이나 승진 시에도 우선권이 제공돼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직장생활과 자녀양육을 병행하는 여성에겐 추가 점수를 줘 승진에 도움이 되도록 직장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혹자는 부모가 자녀양육에 더 많은 시간을 뺏기면 한국의 경쟁력이 추락하지 않을까 염려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한국의 미래가 없다면 국가의 경쟁력을 걱정할 필요도 사라지니 말이다. 그래도 보육과 양육에 대한 지출이 너무 심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귀담아들으시라. 당신은 혹시 앞으로 저출산이 20~30년간 지속될 때 생길 사회적 비용을 계산해봤나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