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탱고에 빠진 사람들 땅고 아르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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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베론. 아르헨티나 영화배우이자 탱고를 추는 사람이다.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탱고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겐 '탱고의 살아 있는 신화'다.
골프로 치면 타이거 우즈요, 팝가수에 비유하면 마이클 잭슨이다.

스텝을 밟는다. 그 박자에 맞춰 강물도 출렁거린다. 반포대교 밑에 선 ‘아르떼’ 단원 조원철씨(오른쪽)와 박혜진씨.

그런 베론이 지난주 서울을 찾았다. 직접 강습도 했다. 탱고의 세계적 거장이 손수 아브라소(Abrazo.기본 포옹 동작)를 취하고 스텝을 밟아 보였다. 사람들은 흥분하고 감격했다.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20분 남짓 작은 공연도 했다. 무대는 전율 그 자체였다.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흐느끼듯 무대를 휘감는 춤사위에 관객들은 넋이 나갔다. 비명처럼 환호가 터져나왔다. 눈물을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격정을 토해냈다. "그는 나의 영웅이다. 그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무엇보다 그를 우리 힘으로 불러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우리 힘? 그렇다. 탱고의 황제를 초청한 건 공연 기획사도, 프로모션 관계자도 아니다. 바로 '땅고 아르떼(Tango Arte)'란 이름의 탱고 동호회 회원들이다.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베론의 개런티와 항공료, 체재비를 댔다. 베론의 아시아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지 돈만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거장을 불러올 수는 없었을 터. '땅고 아르떼' 회원들은 1년 전부터 '베론 초청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때론 e-메일로 자신들의 절절한 마음을 전달했고, 심지어 직접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삼고초려하기도 했다. 그런 극진한 정성이 베론의 마음을 움직였다. 베론은 "난 한국이란 나라를 정말 몰랐지만 이들의 열정에 탄복했다"고 말했다.

땅고 아르떼 회원들은 그저 보통 사람들이다. 학교 교사도 있고, 건설회사 직원도 있으며 반도체 연구원도 있다. 단지 탱고를 좋아하는, 아니 푹 빠져 있다는 공통분모를 가졌을 뿐이다. 이들은 가끔씩 모여 단순히 친목도모를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아르떼(Arte)'란 자체 공연단도 만들었다. 피나는 연습 끝에 이미 대여섯 차례 정식 무대에도 올랐다. 막연히 무언가를 꿈꾸는 것이 아닌, 직접 두 발로 찾아 나서며 자신의 관심과 열정을 맹렬하게 키워 나가고 있다. 아마추어의 정신은 갖고 있되 실력과 정열은 프로페셔널에 버금가는 '프로추어(Pro-teur)'인 것이다. 이번 주 week&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또 다른 자화상인 프로추어 '땅고 아르떼'와 스텝을 맞춰 봤다.

무작정 떠난 탱고 남녀

중학교 무용 교사인 조명희(33)씨와 증권사 펀드매니저인 정종상(32)씨가 처음 만난 건 2002년 말. 살사 동호회의 한 파티장이었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취미, 무엇보다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한 춤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온 터라 둘은 쉽게 친해졌다. 또 다른 공통점은 '탱고'에 필(feel)이 꽂혀 있었다는 것. 영화 '여인의 향기' '탱고 레슨' 등을 통해 관능적이고 아련한 동작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나 국내엔 마땅히 가르쳐 주는 곳도, 배울 만한 스승도 없었다.

"직접 아르헨티나를 가 보면 어떨까. 뭔가 잡히는 게 있지 않겠어."

둘은 의기투합했다. 종상씨는 좀 더 절실했다. 회사를 아예 그만두고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고 싶었다. 명희씨가 방학을 맞은 이듬해 1월, 둘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훌쩍 떠나갔다. 숙소는 유스호스텔로 잡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준비 없는 아르헨티나행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우선 말이 안 통했다. 현지인들이 영어를 전혀 몰랐다. 더듬더듬 스페인어에 발짓 손짓 써가며 탱고 학원을 물어도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렇게 열흘을 허송세월했다.

그러다 우연히 '내셔널 탱고(National Tango)'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구세주였다. 무조건 등록하고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낯선' 사람이었다. "동양인 처음 본다"며 구경오는 사람도 있었다. 명희씨는 특히 서로 양볼을 맞대는 인사가 꺼림칙했다. 학원에서 한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명희씨는 질겁을 하며 피했다.

그러나 탱고는 남녀가 함께 추는 춤. 명희씨의 이상스러운(?) 행동은 단숨에 그녀를 '왕따'로 만들었다. 아무도 그녀와 춤추려 하지 않았다. 모두 짝을 이룰 때, 그녀는 '뻘쭘히' 혼자 남곤 했다. 벽을 붙잡고 혼자 춤을 춰야 했다.

비 맞으며 무대에 오르다

힘들었지만 한 달 보름 남짓한 아르헨티나 생활은 둘에게 탱고가 무언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해주었다.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2003년 3월 '땅고 아르떼'(cafe.daum.net/Tangoarte)란 온라인 카페를 만들었다. '탱고 강습회'도 열었다. 강사는 명희씨와 종상씨가 맡았다. 매주 일요일 오후 대학로의 한 스튜디오를 빌렸다. 강습료는 두 달에 5만원. 대전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비롯해 '골수분자'들이 생겨났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처음엔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조금씩 빠져들면서 어려운 동작에 성공하면 희열을 느끼고, 옆 사람보다 더 잘하고 싶어하고…. 그러더니 이젠 남들 앞에서 뽐내고 싶어한다. 이듬해 1월 이들은 아예 '아르떼(Arte)'란 이름의 탱고 공연단을 꾸렸다. 강습회에 가장 열심히 참여한 남녀 6명씩 12명가량이 주축을 이뤘다. 매주 토요일마다 연습을 했다. 기왕 할 거 제대로 해보자며 국립 발레단 출신의 무용가를 스승으로 모셨다. 스트레칭부터 간단한 스텝, 푸앵트(발가락 끝으로 서는 동작) 등 기본기를 다졌다.

데뷔 무대는 2004년 5월 하이 서울 페스티벌. 돈도 안 들고 관객을 동원할 필요가 없어 안성맞춤이었다. 막상 공연이 잡히자 평일에도 최소 주당 이틀씩 연습에 돌입했다. 12명의 퇴근 시간이 다 달라 보통 밤 10시에야 전원이 모일 수 있었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파김치가 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건축 설계일을 하는 박진숙(25)씨는 "춤바람나서 아침에 지각한다는 말 듣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고 회상한다. 하이닉스 반도체 선임연구원 조원철(36)씨는 모자란 동작을 보충하기 위해 아예 일주일 휴가를 내기도 했다. 데뷔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명희씨는 "무엇보다 어머니가 보고서 '네가 왜 그렇게 미쳤는지 알 것 같다'란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뻤다"고 전했다.

3개월 뒤 서울광장 시민축제에 초청받았다.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초청된 10여 팀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그들만 현장에 갔다. 주최 측은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다. 미끄러져 다쳐도 책임질 수 없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이왕 준비한 거, 이대로 접기엔 너무 아쉬웠다. 무대에 올랐다. 물방울을 퉁기며 스텝을 밟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신기한 듯 하나 둘 모여들었다. 20분 남짓한 공연, 앙코르가 터져나왔다. 진짜 프로가 된 것 같았다.

"고스톱 치는 것보단 백배 낫잖아요."

2004년 겨울, '아르떼'는 그럴 듯한 조직체계를 갖췄다. 단장(조명희).고문(정종상).수석(조원철).정단원.부단원 등. 신입 단원 오디션도 보았다. 사실 실력은 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지 그 열정을 중시했다. 지원자 중 '작업남'으로 유명했던 딱 한 사람만 탈락시켰다.

1주년 기념 공연을 홍대 부근 탱고바에서 갖기로 했다. 다른 탱고 동호회원들도 오는 자리, 연습은 더욱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젠 제법 출 수 있게 된 탓인지 파트너끼리 의견 충돌이 많아졌다. 서로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며 툭하면 다퉜다. 여자 단원의 남자 친구가 "낯선 남자랑 달라붙어 춤추는 꼴 볼 수 없다"며 연습실로 쳐들어오는 사건도 있었다. 안팎으로 위기였다.

그맘때 종상씨는 탱고 악기 반도네온를 배우겠다며 아르헨티나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파블로 베론을 만났다. "당신을 한국으로 초청하고 싶다" "한국? 거기가 어디지?" 철저한 무시였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에 있던 단원들이 구원군으로 나섰다. 베론의 e-메일로 구구절절 사연을 보냈다. 공연 장면을 담은 CD를 보내기도 했다. 명희씨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아르헨티나로 날아갔다. 전문 공연 기획자인 것처럼 꾸민 명함을 제시하며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했다.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동원한 양동작전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정성에 감동한 베론이 실비 수준의 개런티로 방한을 수락했지만 스폰서없는 개인들로서는 그것도 만만한 돈이 아니었다. 명희씨와 종상씨가 큰 짐을 졌고 나머지 단원이 십시일반 거들었다.

돈이 생기지도 않는데, 아니 자기 돈을 쏟아부으면서까지 왜 이렇게 탱고에 몰두하는 걸까. 수석 단원 원철씨는 "탱고를 추기 전까지 마땅한 취미란 게 없었다. 그저 친구 만나 술 마시고, 당구 치고, 고스톱 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는 것보단 백배 낫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연극배우인 박혜진(26)씨는 "연극 배우로 무대에 설 때보다 탱고 댄서로 공연할 때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대웅제약에 다니는 이태현(31)씨는 "평생 내가 잘할 수 있는 확실한 여가활용법을 보험처럼 든 기분이다. 탱고를 추고서 일의 능률도 오히려 더 나아졌다"며 활짝 웃었다. 모두 소박하지만 그래서 더욱 놓치기 쉬운 소중한 삶의 의미를 터득한 도인들처럼 보였다.

글=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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